Skip to content

외전 B 승인 上

Volume 1

•DJG•15 min read
1편과 2편 사이 시점입니다. 삽입형 토이 묘사가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세요.
2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감정을 정리할 가벼운 패치입니다. 지나가셔도 무방합니다.



사락. 부드러운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손가락을 빗처럼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짧은 머리칼을 빗어 넘긴다. 온화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나른한 감각이 전신을 맴돌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꿈이 아닌 거겠지. 의식한 순간 슬쩍슬쩍 정수리를 스치는 손가락이 금속으로 되어있음을 깨닫는다. 네바는 불만스럽게 눈을 뜬다.

42, 마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옆에 턱을 괴고 누워 있다. 눈을 뜨자 손의 움직임이 멈춘다. 코모란트는 군용 함선이라 침상이 병영만큼이나 작았다. 한 층을 위아래 반씩 나누어 사용해 덩치가 큰 그가 아래에 앉으면 머리꼭지가 천장에 닿았다.

“너무 달라붙지 마.”

네바는 일부러 그를 무시하며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열흘 동안 연구소보다 훨씬 더 좁은 함선 안에서 지내면서 강제적으로 생기는 친숙함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항 나흘째 되는 날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짧고 가볍게 섹스하는 데 성공했다고, 마리는 모든 상황을 용서받은 것처럼 굴었다.

모든 긴장이 사라지고 찾은 평화로운 일상이 어색했다. 창 밖으로 요란한 빛만 지나가는 초광속 항로에서의 수백 시간이 술술 흘러갔다.

마지막 자존심을 차렸지만 그뿐. 그는 전혀 굴하지 않고 뒤에서 부둥켜안았다. 가벼운 반팔 한 장에 얇은 드로즈만 입은 네바와 정반대로. 두툼하고 가슬거리는 스웨터가 그를 안아왔다.

몸만 달랑—그마저도 전부는 아니었지만—따라온 마리는 당연하게도 입을 옷이 전혀 없었다. 찢어지고 해진 연구소 공용 옷은 전부 버렸다. 노출된 금속 프레임을 가리기 위해 긴팔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네바는 항시 함선을 덥게 유지하는 열대형 인간이었다. 이 안에서 입을 편안한 옷은 짧은 게 전부고. 그나마 남은 외출복도 크리오에 내려가면서 전부 껴입는 바람에 이젠 우주를 떠도는 재가 되었다. 몇 장 남지 않은 보온용 스웨터가 그가 줄 수 있는 최대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에는 헐렁하고 거대한 니트. 마리는 기쁜 듯 온종일 손등까지 흘러내리는 니트를 입고 다녔다. 전 더위를 느끼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구석구석 난방 시설을 둘러 뜨뜻하게 유지되는 함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더워.”

옆구리를 꼭 껴안은 팔을 잡아 내린다.

“더운 거 좋아하시니까. 좋다는 뜻이겠네요.”

“아닌 거 알면서 까부네.”

아침 드시라고 깨웠습니다. 이제 항로 절반 정도 왔어요. 마리는 순순히 차렷 자세로 팔을 내리곤 얼굴을 목덜미에 댄다. 코. 이마. 튀어나온 순서대로 그의 얼굴이 살결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계란 냄새가 난다. 버터 향이 꽤 진한데. 반가운 냄새에 네바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가 가져온 트레이를 본다. 부드럽게 섞인 스크램블. 얼굴이 돌아가자 마리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입술 위에 뽀뽀한다. 여기 있을 수 없는 요리에 깜짝 놀란 네바는 질색으로 응답하는 것도 잊고 몸을 일으킨다.

자신이 들고 온 접시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것을 발견한 마리가 활짝 웃는다. 스르륵 기묘한 동작으로 빠져나가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스크램블 드세요.”

“어떻게⋯, 어떻게 만든 거야? 내 조합기 업그레이드했어?”

네바는 팔과 엉덩이를 움직여 침대 끄트머리로 나온다. 바로 옆에 놓인 담소용 테이블에 앉아서. 그가 건네는 따뜻한 접시를 받는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정거장에 가까워질수록 오가는 통신량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음식 재조합기 관련 커뮤니티를 발견해서. 꼼수를 배웠습니다.”

자체 식량 조달이 불가능한 곳에선 필수적이었으므로, 음식 재조합기와 카트리지 가격은 상당히 고가였다. 화성 정착지에 메인 본사를 둔 기업 하나가 기술을 거의 독점 생산하는 시장인 것도 한몫했다. 필수재에 달라붙는 각종 규제에 응답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등급제였다. 최소한의 기능을 남겨놓은 저가 모델을 선심 쓰듯 내놓기. 조합기가 구현 가능한 음식은 구매한 가격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모든 조합기의 부품이 사실 동일하다는 건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야 추가금을 내자마자 바로 윗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줄 수 있을 테니. 그 행태가 괘씸해서라도 일부러 등급을 올리지 않고 우회법을 찾아내는 이들이 많았다.

오직 최첨단 기술로만 이루어진 군용 함선의 음식 재조합기는. 당연하게도.

가장 베이직하고 낮은 등급이다.

안타깝게도 군사 자문 AI들은 군인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퀄리티가 전투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랐다. 네바는 돈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업그레이드하고 관리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초기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는 쪽이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드릴까요?”

아니. 네바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포크를 입에 넣는다. 어차피 알아서 대답할 거니까 저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계란 한 입이라도 더 먹는 게 이득이다. 몰캉거리는, 덜 익은 스크램블이 갓 깨어난 입안을 간지럽힌다. 윗부분이 액체에 더 가까운 황금색 계란은 키스할 때 닿는 작고 촉촉한 혀보다도 만족스러운 촉감을 선사했다.

“서니사이드 1단계를 입력하고, 6초 뒤에 꺼내면 바닥만 살짝 익은 합성 날계란을 얻을 수 있대요.”

지구산 닭이라곤 한 톨도 닿지 않았지만. 수많은 레시피가 그 단위에 의존했으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50g의 흰자와 노른자를 계란이라고 불렀다. 그보다 큰 옵션은 오리알, 작으면 메추리알. 네바는 사실 메추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단백질 액에 계란 향을 입힌, 합성 날계란을 팬에 담아 맛있는 스크램블을 만든 범행 자백이 조잘조잘 이어진다. 비릿한 합성향을 날리려면 강불에서 조리해야 하는데, 강불에서 이 정도의 스크램블을 만들어내는 건 제법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요리 실력에 재능이 있는 듯하다.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는 중이었고. 네바는 정사각형으로 각이 잡힌 합성 사워도우에 스크램블을 올려 씹는다.

“—그리고 후추랑 버터를 아끼지 않고 넣으면 끝이에요.”

“버터는 어떻게 얻었는데?”

“그건 식재료 창고에 있던데요?”

우뚝. 즐겁게 우물거리던 네바의 입이 멈춘다.

“… 너 혹시 유로파 버터 쓴 거야?”

“네.”

“그거 얼마짜린 줄 알아?”

그건 오래전 떠벌리는 걸 좋아하는 어떤 부대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버터였다. 목성 위성인 유로파 해저에서 발견된 미생물로 발효했다는 유로파 버터. 다른 행성에선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젖산이 주는 산미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게다가 저중력 환경에 맞춰 개량된 소가 생산한 우유는 기포가 매우 미세해 크리미한 질감을 냈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목성의 중력까지 더해져 우유 안에 복합적으로 생성되는 공기 방울이 입안에 남다른 풍미를 가져다준다는 게 브랜드의 주장이었다.

“마켓에서 평균 89130크레딧이요.”

“알면서도 썼네?”

그걸 늘 흘려 넘기던 네바는, 어느 날 생긴 돈으로 홀린 듯 발효 버터를 구매했다. 과연 얼마나 다를까 궁금해서.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하고.

소규모 테라포밍 정착지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온갖 고가 상품을 생산했고, 그 카테고리의 대다수는 실험실에서 탄생한 최첨단 식재료였다. 프리랜서라 균일하지 못하더라도 버터 한 덩이에 평균적인 월 수익을 전부 붓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언젠가 자축할 일이 있을 때 먹으려고 했는데. 요리하기도 아까워서 맛난 크래커에 올려 천천히 입으로 녹여 먹으려던 내 버터가. 예쁘게 익은 알 사이사이에 섞여 있단다.

“유통기한이 지나서 사용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났나. 너무 비싸서 아낀 게 벌써 일 년이 넘게 지났다니. 사실 지금의 요리 실력으로 이보다 더 맛있는 버터 요리를 내놓을 자신은 없었다. 본인의 한 달, 정거장 노동자라면 반년은 넘게 일해야 얻을 가격이 들어간 그릇을 빤히 쳐다본다.

“어쩐지 맛있더라.”

“영양학적으로는 괜찮지만, 이온 조성은 다른 버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제품이던데요. 제가 정보망에서 확인한 별점도 5점 만점에 1.7점이었습니다.”

“아니. 이건 맛있어야 되는 버터야.”

네바는 입을 삐죽이며 포크를 놀린다. 제발. 내 환상을 깨지 말아줄래. 환상적인 스크램블을 만들어낸 기술력은 마리의 섬세한 손동작이 아니라 먼 태양계에서 보내준 첨단 바이오 테크놀로지라고 우기고 싶었다.

“상술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네바가 생각하고 싶은 뜻에 따를게요.”

마리는 우주 어딘가를 떠도는 산타 할머니를 기다리자는 듯. 지켜주겠다는 미소를 표면에 띄운다. 그것을 철저하게 외면하며. 네바는 계란이 오버쿡되지 않게 조금만 데운, 따스한 그릇에 담긴 아침 식사를 먹어치운다.


가벼운 오전 운동을 마친 네바는 식량 창고에 들어간다. 아침에 마리와 했던 대화 때문에 식량을 미리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거장에 내려가 사둘 건 없는지, 크리오에서 장기간 방치된 재료 중 버려야 할 건 없는지 살펴볼 겸.

창고 앞에는 작은 살균 및 음압 장치가 있다. 정확히는 바이러스 및 각종 위험 요소를 제어하기 위한 의료 시설이다. 전투 후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이쪽으로 옮겨져 1인용 냉동 캡슐 안에 보관됐다. 현역 시절 네바와 같은 군인들은 함선마다 마련된 이곳을 영안실이라고 불렀다.

기존 공용 부엌 옆의 식량 창고는 훨씬 아늑하고 아담한 신체 단련실로 개조됐다. 조합기에 의존하고 있어 자주 사용할 일이 없으니, 가장 구석의 영안실에 식재료를 몰아넣는 건 꽤 합리적인 동선이었다.

벽면 선반에 균일하게 정리된 상자 대부분은 재조합기에 보충할 인공 탄단지 카트리지다. 조합기가 흉내 낼 수 없는 다채로운 풍미의 식재료는 바닥에 놓인 냉동 캡슐 몇 개에 모아두었다.

하나는 술 창고, 다른 하나는 귀하고 특이한 식재료. 마지막은 별로 사용할 일 없지만 아무튼 냉장고. 재료라기보단 요리를 크게 거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간식이 대부분이었다.

냉동 캡슐을 열어놓고 그간 모아둔 전리품을 살피자 간만의 싸늘함이 넘어온다. 함선 온도는 더울 정도니 그는 가벼운 티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과하게 얼었거나 포장 상태가 나빠진 것을 골라내자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마리가 문 앞에 놓은 상자를 나르며 안으로 들어온다.

“야!”

소리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상자는 외부 출입문 안쪽에 있는 격리문이 닫히지 않기 위해 대강 대어 놓은 것이었다. 쾅. 순간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마리는 뒤를 돌아 문 손잡이를 잡았지만 이미 문은 닫혀서 열리지 않았다.

“한 번 닫히면 잘 안 열린단 말이야.”

그동안 귀찮아서 수리 안 하고 계속 열어두고 사용했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진 일에 네바는 머리를 짜증스럽게 털어낸다.

“… 정리 다 하고 이따 보자. 아마 경첩 문제일걸.”

“죄송합니다.”

“내가 이쪽 상자에 버릴 거 담을 테니까 네가 전부 날라. 소각처리도 네가 하고. 벌이야.”

알겠습니다. 표정을 보니 방금 벌이 아니라 포상을 준 것 같은데. 마리는 뭘 시키면 늘 반색하며 따랐다. 이번에도 관심을 가지며 바짝 다가와 캡슐 앞에 앉는다.

“시신 보관용 포드를 냉동실로 쓰는 이유가 있습니까?”

“왜, 안돼?”

“위생적인 부분에서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분 문제’에 까다로우신 줄 알았는데 의외처럼 느껴집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익숙해진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유연해지는 타입인 거군요.”

네바는 그 안에 숨은 함의를 모르는 척하며 정리에 집중한다. 마리는 빙긋 웃으며 상자를 들고 창고 안을 둘러본다. 원래는 위에 놓인 선반까지 빼곡하게 캡슐이 놓여 있었지만, 더이상 전투에 참여할 일 없는 군함이니 모두 떼어서 팔았다. 비상용으로 남겨 둔 캡슐 하나만 전원이 꺼진 채 구석에 놓아뒀다.

“여기선 내 말 듣고. 정거장에 내려가면 그 태도 고쳐놔.”

“어떤 태도 말씀이십니까?”

“지금처럼.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거 있잖아. 인간 행세한다며.”

네바는 표면에 성에가 낀 타이탄 베리 봉지를 꺼내서 턴다. 극저온 행성에서 진화된 식물의 열매였는데, 특유의 얼음 결정으로 수분을 보관해 파삭거리는 신기한 식감이 났다.

“여전히 특정 행성은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당신을 호위하거나 보조하는 낮은 신분의 사람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리는 곰곰 생각해 보다 답한다. 베리 몇 알을 꺼내 입안에 넣자 단순한 얼음 결정이 씹힌다. 자라난 환경을 벗어나면 아무리 냉동 창고에서 보관해도 독특한 식감이 유지되지 않았다. 상큼한 향까지 휘발되어 그냥 단단한 얼음이 되는데, 크리오에서 방치되는 동안 얼음화가 진행됐다. 오도독, 값비싼 얼음이 튼튼한 이 사이로 부서진다. 네바는 아까운 베리 봉지를 만지작거리다 버릴 상자 안에 넣는다.

“누군가를 저자세로 만드는 사람은 범죄의 타깃이 되기 딱이지. 지갑이나 몸값을 노린 어중이떠중이랑 싸울 시간 없어.”

“직장동료 선이면 될까요? 동업자나 파트너요. 네바도 저에게 상호 경어를 사용하면 어떻습니까?”

“흠. 그건 내가 싫어. 대충 친구 정도로 하자고.”

친구. 마리가 신난 듯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제가 내려가서 스킨십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직장동료나 친구 사이에도 그런 걸 하나요?”

“… 아니. 거의 안 하지. 얼마나 주물러 댈 작정이길래 그래.”

뜬금없는 질문에 네바가 고개를 든다.

“‘거의’라면 예외 상황이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경우라면? 그는 중얼대며 아무 치즈 블럭을 집어 든다.

감정이 실리지 않는 섹스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앞에 선 인공 존재조차 증명하지 않았나. 함부로 정의하지 않고 애매한 상태에 두는 관계는 뒤가 구리다는 뜻이었다. 대체로 질척하고 더럽게 끝날 법한.

손끝으로 치즈 포장지를 문질렀다. 유통기한 글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치즈는 언제 산 거지? 어디서? 왜 샀지? 우리는 뭐 하는 사이지? 관계를 정의해야 할 타이밍이 기어코 찾아온 걸까. 생존 문제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건 그런 복잡한 문제 역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여자관계에 관한 몇 기억이 뇌를 긴박하게 스친다.

“긴장하셨네요. 당장 ‘친구 이상’이 되자는 건 아니었는데. 네바라면 ‘친구답게’, ‘연인답게’ 따위의 틀에 얽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치 빠른 유닛이 그를 읽는다. 역할놀이를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누군가 물어보면 뭐라고 둘러댈지 시나리오를 구성했을 뿐이에요. 제가 적당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유통기한 지난 거 맞습니다. 그것은 덥석 치즈를 가져가 상자에 넣는다. 네바는 어색하게 몸을 돌린 채 얼어서 터진 술병 조각을 몇 개 집었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가 가능한지 여쭤보면 폭발하실 것 같으니 멈추겠습니다. 하지만 망설이신다는 건 긍정적인 사인으로 받을게요.” 한 쌍의 눈웃음이 이쪽을 본다.

네바는 대답 없이 급히 화제를 돌린다. 입대 전에야 종종 애인을 사귀기도 했지만, 군 복무와 용병 생활은 누군가를 장기간 만나기엔 너무 불안정한 삶이었다. 부대 안에서도 짧은 섹파들이 전부였고. 선언으로 시작하는 관계가 어색한 그에게 이토록 오래 들러붙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이걸 뭐라고 정의하지? 애초에, 유닛에 진지한 인간관계를 대입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가?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게 애인이랍시고 유닛을 보여주는 상황을 상상한다. 얘들아, 나는 우주 해적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섹스로봇을 친구 이상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중이야. 이전의 자신이 가장 먼저 폭소했을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해. 애완동물? 섹스토이? 자신을 사랑한다며 우주 끝까지 쫓아올 기세인 유닛이 들으면 서운할 일이었다.

일부러 알맹이 없이 구르는 대화가 몇 번 지나고. 공기를 의식한 네바가 먼저 물었다.

“… 근데 좀 춥지 않아?”

“아까보다 창고 내부 온도가 20도 떨어지긴 했습니다.”

냉동 캡슐 앞에 서서 추운 줄 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니 공간 전체가 추웠다. 옅은 입김이 새어나오고.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은 맨피부를 문지른다.

“왜 이 안에 냉방 시스템이 돌아가는 거지?”

당황한 네바는 주변을 둘러보며 살핀다. 여긴 그냥 시원한 정도로 유지되고, 냉동 기능은 캡슐 안에서만 작동해야 하는데.

“음. 출입구 문이 열려서 온도 유지 장치가 작동했네요.”

“아까 네가 들어오면서 전부 닫았잖아.”

마리는 문가로 다가가서 천천히 모서리를 더듬는다. “지금 함선 시스템은 열림으로 인식 중입니다. 이쪽이 비틀려서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 같아요. 온도 센서로 확인하니 이 부근에서 냉기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일이 안 풀리려면 이렇게 안 풀리네. 네바 역시 출입구 쪽으로 다가와 문을 살핀다. 창고는 살균 구역 때문에 이중문으로 되어있었다. 외부 창고 문이 닫힌 채 내부 문이 열려 있으면 내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방 시스템이 더 강력한 강도로 작동한다. 그건 알겠는데. 그런 것 치고도 너무 과하게 춥지 않나? 조금 전부터 발 주변에 느껴지는 온도가 심상치 않았다.

“오랜만에 작동한 거라 배관이 터져 액체 질소가 누출된 것 같습니다. 2분 이내에 영하 100도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리는 가장 듣기 싫었던 답을 내어놓는다. 아니지. 골치 아픈 문제가 더 긴급한 문제로 덮이는 쪽이 차라리 반가웠다. 마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면 어려운 문제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네바는 다급함을 가장해 문 위에 손을 올린다.

“그럼 빨리 문 수리하고 나가자고. 경첩이 너무 오래됐나?”

“문 자체가 뒤틀린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양쪽에서 지렛대 같은 걸 끼워서 판판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마리 역시 차가운 금속 문 표면을 더듬어 수평을 가늠한다.

“이 파이프면 될까?”

네바는 바닥 근처를 지나는 배관을 찾는다. 잠깐만요. 그리고 둘은 동시에 위험 직감을 느낀다.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간 순간 손바닥을 자극하는 한기가 엄청났다. 얼어붙은 금속을 맨손으로 쥘 순 없었다. 네바는 손을 빠른 속도로 거둔다. 사실 슬슬 발이 아파 서 있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아래에서부터 응결된 수증기가 하얗게 넘실댄다. 얼음 나라에서 탈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차라리 캡슐 위로 올라가려고 하자 마리가 잽싸게 스웨터를 벗어 그에게 뒤집어씌운다. 다시 복슬하게 포장된 채 고개만 뿍 튀어나온 그를 안아 올린다.

“고칠 시간 없으니 일단 포드 안에 들어가 계세요.”

그는 가장 구석에 있던 캡슐로 걸어간다. 네바는 맨 가슴에 안겨서 꾸물거리며 소매로 팔을 뺐다. “이건 배터리 빼놨는데.”

“단열 구조니까 20분 정도는 유지 가능할 겁니다. 그 전에 제가 함선 시스템으로 냉각수를 차단해 보겠습니다.”

캡슐 앞에 네바를 내려놓고. 그는 몇 초 있다가 판단을 마치고 본인이 먼저 들어가 눕는다.

“제가 더 무거우니 아래에 있겠습니다.”

1인용 캡슐 아래를 가득 채운 마리가 그를 부른다. 빨리 들어오세요. 방금 전 그런 대화까지 나눈 탓에 통이 넓은 반바지 하나만 걸친 몸이 새삼스럽게 의식된다.

누구 탓을 하리. 원래 사고는 여러 사람의 실수가 절묘하게 중첩되었을 때 일어나는 거다. 네바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마리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 일부러 짓뭉개듯 맨 가슴 위에 눕자 등 윗부분에 얼굴이 닿는 느낌이 났다.

“마주 안아 밀착해야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1인용 캡슐이잖아요.”

참 나. 네바는 몸을 구깃구깃 굴려 그를 안는다. 닫겠습니다. 그의 스웨터에 눌린 마리가 꿍얼거렸다. 뚜껑이 닫히자 내부가 몸 두 개로 꽉 들어찼다. 그동안 여기 들어올 정도의 심각한 중상은 입지 않은 게 나름 자랑이었는데. 혼자도 아니고 둘이서 관짝에 들어올 줄은.

“팔 하나가 더 있었으면 좁아서 못 들어왔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되도않는 농담이 올라왔다. 마리는 포근하게 한 팔을 들어 그를 안고 발열한다.

“차단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10분 정도요. 지금 시도하고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반 뼘 위의 뚜껑이 계속 차가워진다. 뒤통수가 시렸다. 네바는 팔에 힘을 줘서 버티다가, 포기하고 따뜻한 몸체에 엎어진다. 깜빡이는 속눈썹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바짝 붙어있는 게 어색해 다리를 굽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말할 때마다 얕게 진동하는 목과 가슴판이 시야에 가득 잡힌다.

“단순히 수도꼭지를 잠그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냉동 시스템이야 독립 회로지만, 난방 배관을 포함한 다른 파이프가 근처에 엮여서 함부로 차단하면 연쇄적으로 고장 날 수도 있습니다. 열화상으로 균열 체크하면서 정리하는 중이에요. 어떤 천재 엔지니어 덕분에 새로 우회하거나 뜯어고친 부분이 도면에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아 전부 수동으로 움직여야 하고요.”

콕콕. 길쭉한 손가락이 그를 찔렀다. 잘못 건드렸다가 엔진 냉각수에라도 문제 생기면 제 시신을 여기 넣어두시겠죠. 맞아. 잘 아네. 네바는 잠시 전기장판처럼 끓어오르는 유닛 위에 누워 숨을 돌린다. 곡선으로 된 가슴 위에 누운 게 어색한 나머지 계속 뒤척거렸지만.

누출된 질소가 깔리면서 공기를 밀어내는 중이라 대기 시스템도 난리예요. 환기 최대한 돌려서 잘 빼보겠습니다. 마리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팔의 각도를 바꿔가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중에 정거장 내려가면 뭐 하고 싶으세요?”

그러다 불쑥, 질문이 올라온다.

“그건 갑자기 왜?”

네바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본다. 마리 역시 얼굴을 뒤로 기울여 그를 볼 수 있도록 약간의 거리를 만들어 준다.

“공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관심을 돌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델타-2 정거장 다운스트리트 부근에 이런 수리를 봐 주는 사설 업체 하나가 호평입니다. 그 옆옆 골목의 바에서 지구산 고급 럼을 취급한다고 하니, 저녁 무렵에 수리가 끝나면 가볼 수도 있겠네요.”

이야. 그동안 혼자 그런 거나 뒤져봤어? 네바는 그를 툭툭 친다. 궁금하잖아요. 가까워질수록 통신량이 늘어 매일 모니터링 할 데이터도 늘었습니다. 약간 들뜬 목소리가 이미 그 동네에 다녀오기라도 한 듯 떠벌거렸다.

“전 크리오 밖을 나가본 적 없었습니다. 설레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 앞에 있는 국수 노점도 많이 언급되는 곳이니 점심으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너는 먹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고? 나 혼자만 먹으면 수상할걸.”

마리는 그와 지내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충전도. 외부 탐사나 발열 기능처럼 급격히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상시엔 유닛 내부 자가발전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수십 년 전 모델이라 그렇지 이젠 아무도 유선으로 충전하지 않는다나. 그러고 보니 그렇게 연결된 유닛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것을 떠올린다.

“저작 활동은 가능합니다. 내부 저장소에서 미생물을 이용해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한데, 아시다시피 전부 죽은 지 오래입니다. 그게 아니면 나중에 도로 뱉어내야 해서 안 먹었습니다. 토하고 청소하는 감각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거든요. 수리하면서 미생물 보충해 달라고 하면 됩니다.”

“맛도 느끼나?”

“그러지 못했다면 네바가 시큼하다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방금 한 말은 명백히 귀를 겨냥한 것 같았는데. 훅 들어온 바람에 네바는 좁은 캡슐 안에서 어색하게 꿈틀거린다. 그를 단단하게 안은 팔은 스웨터 끝자락을 만지작거린다. 그렇게 서로를 안고 몇 번 시시덕거리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코드 7.
비정상적인 시스템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함선 인공지능 공격에 대비하여 30초 뒤 비상 전력을 제외한 모든 전원을 차단합니다.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로 피신하시길 바랍니다.
비인가 AI의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곧 전원 차단 및 격리 조치가 시행되오니 모든 병력은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로…,


“… 저게 뭔 소리야?”

“아…, 아? 잠깐만요.”

큰일 났네. 군함은 다르네요. 마리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해진다. 하필 이렇게 인권이 유린당하는 크기에 가둬 놓고서? 가슴에 꽉 안긴 상태라 바깥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 고개라도 돌려보려고 했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뚜껑에 뒤통수만 박았다. 설상가상으로 창고 안 조명도 꺼진다.

야! 아래에 있는 손목을 퉁겨 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대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