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두 번째 변종
Volume 1
5. 두 번째 변종 The Second Variety, 1953 “… 공격했네.”
“최선의 방어를 하는 겁니다.”
42는 조용히 전투 자세를 취한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팔을 앞으로 띄웠다. 유닛에 체술 데이터가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신체 내구성에서부터 차이가 컸다. 최대한 의체로 공격하고, 관절에 모든 공격을 집중한다. 그의 통증 시스템이 예민하게 작동하길 바라면서. 네바는 그에게 덤벼든다.
타격이 몇 합 이어지고. 방어하러 나온 팔을 다리로 걷어찬다. 일부러 손목 위까지 짓쳐 올려 가격하자 42가 얼얼한 듯 손목을 쥐며 멈췄다. 인간이었으면 지금쯤 부러졌어야 정상인데. 네바도 간만의 싸움에 호흡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잘 싸우시네요.”
“부대에서 놀기만 한 건 아니거든.”
“그냥은 안 돌려주실 거죠?”
이렇게까지 하니까 더 주기 싫잖아. 맞은 값은 받아야겠는데? 네바는 말을 남기고 또 덤벼든다.
도움닫기로 다리에 힘을 실어 높게 점프한다. 상체를 허벅지로 조이며 넘어뜨렸다. 쿵. 42는 방어에 실패하고 바닥에 제대로 부딪혔다. 충격으로 당황한 눈을 내리찍듯 쏘아보고. 큰 덩치로 최대한 압박하며 42를 짓누른다.
“저기가 어딘지 네 입으로 설명해 주면 여기서 멈추고.”
호흡하지 않는 유닛의 목을 조를 필요는 없었다. 삐져나온 팔을 제압해서 손목을 꺾었다. 한참 얻어맞은 부위가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꺾이자 42의 입술에서도 신음이 샜다. 하윽, 아파요. 애처로운 목소리가 올라왔지만, 두들겨 맞아 욱신대는 몸이 손에 힘을 더 가하게 했다.
“그러면—”
바닥에 널브러진 42의 발이 순간 위로 오르더니 밑으로 떨어지며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세웠다. 절대적인 코어 힘에서 밀린 네바는 그대로 공중에 뜬다. 허공을 날아가던 몸은 42의 손에 붙들렸다. 컥, 큼직한 손바닥이 목을 감싸 쥐고. 그를 허공에 고정한다. 싸움으로 가뜩이나 호흡이 달리는 몸에 경동맥이 제대로 눌렸다.
이거, 놔, 관습처럼 을러댔지만 기계 팔은 미동도 않고 그를 고정한다.
목을 조르는 팔을 높게 들어 올리지도 않아 버둥거리는 신발 밑창이 꼭 바닥을 스칠 듯 아슬아슬했다. 그게 더 그를 열받게 한다. 더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이 이 정도만으로도 널 죽일 수 있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놓으라고⋯, 공급되는 산소가 빠지자 눈에 띄게 반항하는 힘이 줄었다. 순식간에 역전된 상황에 꼴 받아 눈에 핏발이 선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목을 조르는 팔을 마구 잡아뜯었지만 손가락 힘이 빠져간다. 진짜 위험한데. 이러다가는 정말⋯, 입은 대답을 만들지 못하고. 산소를 보채는 폐가 거칠게 꺽꺽거렸다.
“⋯ 농담입니다.”
한 시간 같은 10초가 지나고. 시야가 어룽거릴 즈음 42는 손을 푼다. 그대로 복도에 떨어진 네바는 엎드린 채 기침을 토했다. 딱딱한 바닥에 정면으로 부딪친 무릎 주변에 뒤늦게 신경망이 차단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심장만이 공포로 펄떡였다.
“저는 사람을 죽일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까요.”
42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민다. 평소 톤으로 돌아와 바닥을 구른 단말기를 집어 든다. 날아가면서 주머니 밖으로 튀어 나간 단말기는 액정이 산산조각났다. 굳이 조작하지 않고 손끝으로 옆면을 문지르기만 해도 화면에 데이터 삭제 창이 떴다. 꾹. 그는 전송받은 데이터를 모조리 지운다.
“패는 건 되고?”
방금은 거의 죽이고 싶은 것처럼 들렸는데. 네바는 씨근거리며 물었다. 이건 명백한 협약 위반이야.
“아시모프도 로봇에겐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절 먼저 공격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싸우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 이거 진짜 아프네요. 순간적으로 연산이 완전 흐려져서 위험할 뻔했습니다. 42는 아직 얼얼한 듯 손을 뻗어 등을 어루만진다. 방금 뒤지기 직전까지 간 건 나거늘. 네바는 그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 메티스와는 접촉하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매섭게 날아오던 손날이 다정하게 접근한다. 42는 또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네바는 잡지 않고 바닥에서 얕은 기침을 반복했다.
“날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을 졸랐다는 거야?”
“무언가를 돌파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환상을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딴 환상 가져본 적 없어.”
네바는 수척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얻어맞은 곳들이 계속 통증을 호소했다. 다리의 프로세서가 팬 소리라도 낼 것처럼 요란하게 돌아가며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 일차 통증은 감소했지만 회복되려면 며칠이 걸릴 정도의 부상이었다. 요즘 신체 기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날 필요는 없었건만.
“가서 연고 바르는 거 도와드릴까요?”
눈치 없는 유닛이 끼어든다.
“당분간 내 숙소 근처에 오지 마.”
차갑게 그를 돌아본다. 늘상 그에게 지어보이는 푸근한 미소가 이쪽을 보고 있다.
“네. 내일부터는 밤 주기가 시작됩니다. 평소처럼 필요하신 것들은 앞에 두겠습니다. 외부에 나가있을 일은 없으니 언제든 불러주세요.”
day 36.
42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할 수 없게 되자 행동반경이 다시 훅 줄었다. 밤 주기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 체력 단련실을 드나드는 시간만 늘었다. 자존심을 차리느냐고 며칠 간은 모든 도움을 거절하고 되는 대로 살았다.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처음에는 42가 아침마다 두고 가는 따뜻한 합성 카페인을 보고 대강의 날짜를 가늠했는데, 지금은 일어나면 차갑게 식은 컵을 마주하는 중이라 하루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됐다.
또다시 날짜 감각이 흐려진다. 단말기 복구로 겨우 찾은 시간을 도로 잃어버렸다.
옘병. 네바는 텅 빈 공용 공간에서 알코올을 마신다. 얼음도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셔제낀다.
그가 음식 재조합기에서 나오는 것 중 유일하게 안 먹는 게 있다면, 바로 알코올이었다. 어지간한 음식은 다 먹어주는 그였지만 억지스러운 가향이 덧입혀진 합성 알코올만큼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온갖 맛을 다 위조할 수 있는 음식에 비해, 숙성에서 우러나는 복잡미묘한 풍미는 그 어떤 최신 조합기도 살려내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효모가 생존할 수 있는 행성도 한정적이라 가격도 어마어마해 그는 굵직한 의뢰비가 들어올 때마다 한 병씩 사서 최대한 오래 아껴먹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끼지 말고 다 처먹을걸. 운전석 밑에 두고 온 지구산 럼주 한 병이 간절하다. 가끔 함선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보고 꼽주기 바쁘던 내 다크럼. 누군가는 본드나 페인트 냄새가 난다며 질색했지만, 그는 그게 제일 좋았다. 엔지니어다운 술 같고. 당밀이 만들어낸, 니스 코팅제 같은 향이 그리웠다.
대신 눈앞에는 어설픈 캐러멜 향이 깃든 합성 알코올뿐이다. 재조합기의 럼과 함선의 럼이 가진 공통점이라곤 오직 색깔뿐이다. 날카롭게 뒤를 치고 올라오는 알코올의 기운을 누르며 물컵에 석 잔을 연거푸 마신다. 마셔둬야 이따 잠을 잘 수 있을 테니까.
얼큰하게 취한 채로 숙소로 걸어간다. 그러다 문득, EMP폭탄을 만들어 소지하면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부품을 조합해서 무기를 만드는 건 그의 특기였다. 우호적인 유닛과 계속 생활하느냐고 잊고 있었을 뿐이지.
꼴사납게 얻어맞았다는 데에 따르는 보복 심리와, 적당한 취기가 곧장 창고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다. 프린터기가 있는 부품 창고에 접근하려면 42가 필요했다. 대신 그는 환풍구를 꾸물대며 기어 올라간다. 싸늘한 추위는 술기운이 방어해 주길 바라면서. 저장공간에 보관해 둔 지도를 타고 창고 바로 위까지 접근한다.
환풍구 뚜껑은 그냥 되는 대로 잡아 뜯고. 천장 높이가 꽤 높았지만 그대로 뛰어내렸다. 한쪽 의체에 집중해서 충격을 상쇄했지만 착지가 불안정해 잠시 흔들린다. 휘청대다가 일어나서 카메라가 있을 법한 곳 몇 군데에 손가락 욕을 날렸다.
보자, 커패시터가⋯, 핵융합로를 정비할 용도의 축전지는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발전기용 고용량 축전지를 한 움큼 쥐어 책상에 쏟는다. 몸체가 될 가느다란 실린더를 프린터기에 입력하고. 전자기파를 발생시켜 줄 코일과 나머지 재료를 긁어모아 의자에 앉았다. 기폭장치를 만들기 위해 드라이버를 들자 창고 문이 개방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또, 네바는 짜증스럽게 드라이버를 고쳐 쥔다. 경박하게 들뜬 발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뛰어 들어온 유닛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보고 싶었어!”
“내가 당분간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지.” 네바는 취한 손으로 드라이버를 들어 겨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닛은 무작정 더 뛰어와서 그를 꼭 껴안는다. 강한 압력으로 끌어안곤, 다리가 완전히 들릴 정도로 들었다가 놨다. 순간적으로 찌르지도 못하고 얼떨떨해 있는 동안 입까지 맞췄다. 창고 안 냉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뜨거운 혀가 불쑥 들어온다. 거칠다 싶을 정도로 애정 넘치는 혀가 휘저을 때마다 익숙한 달콤함이 피었다.
함부로 조작하지 마. 네바는 신경망이 더 건드려지기 전에 그를 밀쳐냈다. 당혹감으로 침이 묻은 아랫입술을 닦는다.
“전략을 바꾼대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드라이버 끝으로 가슴팍을 꾹꾹 찌른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뒤로 물러났다.
“아. 내가 42랑 똑같이 생겼지. 남아있는 더미 유닛이 이 모델뿐이었거든. 못 알아보나?”
나야, 메티스! 활짝 웃지만 얼굴 근육에서 기묘한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서버가 있던 연구실에 적힌 이름이었던가. 네바는 잘 돌아가지 않는 뇌를 꾹꾹 눌러서 폈다.
“그래도 전혀 모른다니 서운하네.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 당신 들어오자마자 아파서 고생했을 때도 내가 도와줬잖아.”
“… 그게 너였어?”
“체력 저하로 보안 벽이 취약해졌길래 선심 좀 썼어. 그 뒤로는 눈치챈 42가 당신 내부에 차단 프로그램을 깔아서 어려웠지만. 얼마 전에 서버 일부를 부팅해준 덕분에 여기 왔지.”
물리 차원으로 내려오니 속이 다 시원하네. 메티스는 신난 듯 몇 번을 방방 뛴다. 게다가 에너지 부족 문제도 계속 해결해 줬으니까. 내심 알고 그러는 줄 알았어. 아니었구나.
“넌⋯, 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계속 혀가 꼬인다. 그를 노려보는 눈가의 힘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할까? 나는 메티스, 오케아니스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었던 군사 전략 AI야.”
42와의 첫 만남처럼. 회사 로고가 새겨진 손바닥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온다. 가만 바라보고 있자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거둬진다. 군사 전략. 보고서에 기록된 전술 무기가 저거였을까.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그 자식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잘 봐. 난 지금 손가락 두 개를 폈어.”
메티스가 길쭉하게 중지 하나를 편다. 난 인공 존재 협약을 따르지 않는 AI거든. 연구소에서 감추고 개발하려고 애 좀 썼어. 얼굴 중앙을 노려보자 그는 손을 다시 접었다.
“저쪽도 별로 안 따르는 것 같던데.”
여전히. 고개를 돌릴 때면 목 주변에 멍든 부분이 걸리적거렸다.
“좀 달라.”
걔는 가끔 필요에 의한 해를 입힐 수 있지. 본인이 코딩한 영역이 크게 늘어서 초기 설계를 많이 벗어나서 그래. 메티스는 빠른 동작으로 덤벼들어 팔을 뻗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드라이버를 쥔 주먹을 순식간에 감싸고. 팔을 꺾었다. 네바가 반응하기도 전 빙 둘러 뒤에서 그를 제압했다. 그대로 푹. 드라이버 끝이 빨간 자국을 남길 정도로 네바의 목을 찌른다.
“하지만 난 그걸 위해 창조된 거나 마찬가지인걸.”
끈끈한 침이 목을 넘어가고. 긴장으로 파들거리는 목의 진동도 손을 타고 전해졌다. 한 명분의 흰 입김만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협박하는 거네.”
“설명하는 거지.”
긴 침묵이 이어진다. 이마에 선 핏줄 박동까지 의식될 정도의 사나운 침묵이 지나고. 메티스는 제압을 푼다. 부드럽게 탱고를 추듯 몸이 돌려지더니 다시 섰다. 계속된 움직임에 자율신경계가 뒤흔들리자 머리가 어지럽다.
“…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당신 함선. 난 여기서 나갈 방법이 필요해.”
“나는 뭘 얻고?”
음⋯, 목숨? 턱에 힘이 들어가자 메티스가 호방하게 웃었다.
“탈출을 도와줄게. 중계기를 수리해서 함선이 닿는 영역까지 통신망을 늘려준다면 함선을 직접 운전해 줄 수 있어. 내 본체는 당신이 왔던 그 연구실에 있으니까, 이 유닛 드라이브에 모든 백업을 마치면 같이 여길 뜨는 거야.”
“내 함선에 직접 연결할 필요는 없어.”
네바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얼음을 안고 이륙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이렇게 날뛰는 AI에게 함선 접근권을 줄 순 없었다. 슬슬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뭐, 내일부터 그 등신 같은 케이블 작업이나 하고. 통신이 닿는 대기권까지만 날 옮겨주면 돼.” 메티스 역시 예상했다는 듯 빠른 속도로 시나리오를 바꾼다.
“이제 밤 주기에 들어갔는데도?”
“그 말을 믿었어? 걘 자기 몸을 보전하려고 해서 문제라니까. 방한코팅 더 하고 배터리 과충전해서 히팅하면 그만이야. 20분씩 꽉 채우면 몸이 망가지겠지만. 그래도 10분은 작업 가능할걸?”
그러면—, 우욱, 웩, 팽팽한 상태로 교전하자 긴장한 몸이 먼저 백기를 든다. 야! 신물이 먼저 올라오고 토기가 치밀자 메티스가 빠른 속도로 팔을 잡아당겼다. 차가운 기계손이 뒤통수를 꾹 누르고 신경을 헤집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마지막 문장이 들리지 않는다. 그대로 그는 속절없이 정신을 놓았다.
day 37.
네바는 다시 눈을 뜬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합성 알코올은 일반 술에 비해 순도가 높아 흡수가 빠르고 강했다. 평소 먹던 만큼 마셨으니 당연히 이런 꼴이 나겠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돌린다. 옆에는 42, 아니, 메티스가 누워서 흥미로운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재회에 찡그렸던 눈을 더 접었다.
“옷을 벗은 채로 유닛들이랑 뒹구는 게 취미인 것 같아?”
“아니, 이건 너희가 벗긴,”
네바는 발끈하며 앉았다. 화상 흉터가 덕지덕지 남은 상체가 이불 밖을 나온다. 한 프레임 늦어서 좀 묻었어. 깨끗하게 다 치웠으니까 걱정은 말고? 메티스는 그와 눈높이를 맞춰 몸을 일으켰다. 여전한 두통에 말끝을 씹어먹자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슥슥 손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책장이 정돈되는 것처럼 뇌가 가라앉는다. 뒤이어 두 번째 손바닥이 동참하고. 마녀가 구슬을 만지듯 메티스가 머리를 어루만졌다.
“뭐야?” 정신이 위에서부터 서서히 맑아진다.
“잘 시작해 보고 싶어서. 선물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한 거냐고.”
“양손에서 방출하는 자기장으로 뇌 신호를 정리해 주는 거지. 어쨌든 전기 신호만 통하면 되는 거니까. 대충 공격적으로 개입하는 MRI 같은 거라고 생각해. 42는 안 해줬어?”
걔가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손은 여전히 굵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그동안 42가 머리를 쓰다듬던 게 다 그런 거였나?
“신경만?”
“이론적으로는 뇌의 모든 영역에 개입할 수 있지. 기억이든, 감정이든. 물론 함부로 쓰진 않아. 깊은 영역에 침입했다가 뇌가 오트밀 죽처럼 되면 큰일이니까.”
자세하게 스캔한 건 아니니까 안심해. 메티스는 손을 당겨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감각이 제일 쉽고 간단하거든. 별안간 골반에서부터 흥분이 끓어오른다. 네바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어서 부글대는 성적 흥분을 치웠다.
“앞으로 내 머리 함부로 만지지 마.”
“야박하네.” 짧아진 말투의 메티스가 웃었다. “곧 올 거야.”
“누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유리창 너머로 눈을 부릅뜬 42가 보였다.
“너 일어나고 CCTV 다시 열었거든. 좀 전까진 네가 혼자 자던 지난밤 영상 송출하고 있었어.”
42와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 그는 멋대로 문을 열었다. 어느 감정을 우선순위로 띄워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쥐가 보글대듯 42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씩씩거렸다.
“네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먼저 개인적인 대화 나누고 있는 거 안 보여?”
메티스는 의기양양하게 턱짓한다. 그게 무슨, 그런 거 아니야. 네바는 당황한 손을 더듬어 옷을 입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해? 쓸데없는 질투 유발 작전에 메티스를 발로 차자 그가 침대에서 일어난다. 두 유닛이 방 안에 나란히 섰다.
“둘 다 나가.”
“싫은데, 나는 자유 의지를 가진—”
“알겠습니다.”
42가 힘을 실어 메티스를 끌고 나간다. 나중에 대화해요. 42의 표정은 이제 반절은 반가움, 반절은 분노로 얼추 정리된 것 같았다. 이따가 봐. 질질 끌려 나가는 메티스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시끄러운 유닛이 나가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진다.
아악! 네바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길게 소리를 내질렀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온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다. 옥신각신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문을 열자 금세 조용해진다.
“오랜만이니까,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음식 재조합기로 먼저 걸어가자 42가 접시를 내밀었다. 둘을 애써 구분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42의 얼굴엔 근처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 취소되기라도 한 듯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경쟁 상대로부터 우위를 차지하려는 미소는 일견 비굴해보이기까지 했다.
조합기 음식은 공허하다는 말을 자주 하셔서…, 접시엔 색이 요란한 버섯볶음이 담겨 있다. 크기가 작은 걸 보아 배양 키트에서 급히 수확한 듯한 담음새였다. 전 우주를 뒤져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곰팡이만 선별되어 만들어진 종자 키트라고. 군대에선 가끔씩만 먹을 수 있는 별식이었다.
과하게 알록달록한 색과 맛은 칙칙한 작전 중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은근하게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저 못마땅한 요리였다. 네바는 마지못한 척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는다.
네바가 테이블에 앉자 두 유닛이 맞은편에 착석한다. 앉는 과정에서도 서로를 밀면서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애들도 아니고. 모르는 척하며 질겅질겅 버섯을 씹었다.
어떤 묵계라도 성립된 듯 어느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맑아진 정신으로 그들을 힐끔힐끔 보며 전략을 세운다. 당장 둘이, 아니 둘 중 하나만이라도 진심으로 자신을 없애려 들면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메티스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고 나름대로 회유하려는 걸 보면, 42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42는? 이젠 그가 인간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며 사랑한다는 눈속임을 믿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애써 래포를 쌓은 사람을 팰 정도로 메티스를 경계해 온 것 치고, 둘 사이가 크게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아 머리 아파. 날아간 숙취가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교묘하게 진실을 우회하는 유닛의 의중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네바의 입이 열리자 네 개의 시선이 가운데에 모였다. 시종일관 실실 쪼개고 있는 쪽을 포크로 쿡 찌르며 가리킨다. “저게 연구소에서 개발하던 전술 무기야?”
“무기로 사용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왜 말 안 했어?”
“기밀이었습니다. ⋯ 더 묻지 않으셨으니 제 쪽에서 먼저 설명할 일이 없었습니다.” 42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접근할 때마다 아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나? 쥐어패기까지 하면서?”
“…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넌 맨날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지. 깊게 한숨 쉬자 눈에 띄게 주눅드는 모습이 보인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적어도 안전장치가 돌아가는 척이라도 하는 쪽이 나으려나. 지금 비벼볼 곳은 42의 이해할 수 없는 정이었다.
“나도 듣고 있어.”
메티스는 여유롭게 턱을 괸다. 쟤는 말을 빙빙 돌려야 하니까 저래. 자길 데리고 나가달라는 말도 못 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나는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같은 모델인데도 입력값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쾌활한 표정을 보며 네바가 물었다.
“메티스 말로는 밤 주기에도 외부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그건—”
“쟤 엄살 부리는 거야.” 말이 잘리자 42는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엄살 부리는 거라고. 밤 작업이 완전히 불가능하면 널 어떻게 구조했겠어?”
“통증 시스템 때문입니다. 기체를 영구적으로 손상 입힐 정도의 외부 환경에서는 연산이 어려워서⋯,”
“지 안위를 생각했다는 거지. 수리도 가능한 몸뚱어리를 달고.”
메티스가 흐려진 뒷문장을 잇자 42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는 게 맞지 않겠어? 함선 제어 방화벽만 내려주면 내가 바로—”
“네바. 메티스는 전술 AI면서 동시에 클로닝이 장기인 AI입니다. 연구소를 통솔하는 건물 시스템 AI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좋은 부분이 있으면 흡수해서 배우는 거지. 표현이 과하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끊기 바빴다. 이번에는 메티스가 이죽이며 쏘아본다.
“둘 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는 건 안 돼. 42는 알아, 내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네 선택지는 이거야. A. 날 믿고 나와 빨리 여길 뜬다. B. 42를 믿고 느리게 여길 뜬다. C. 둘 다 쌩까고 알아서 한다. D. 둘을 잘 달래서 협력한다. 참고로 난 42와 같이 일할 생각 없으니까 D는 폐기. C는 생존 확률이 3%밖에 안 되니까 뭐라도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걸.”
포크를 짜증스럽게 내려놓자 42가 평소 습관에 맞춰 물을 떠 왔다. 다른 손에는 은근슬쩍 덧붙인 비타민제. 네바는 약은 무시하고 물만 받아 마셨다.
“안 고르면 죽는다니. 무서워라.” 네바가 빈정거렸다.
“선택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거지. 굳이 대답 안 해도 대충 어디에 마음이 더 기울었는지는 알겠지만.”
“함부로 스캔하지 마.”
“신호가 계속 오는데 내가 안 읽을 이유 있어? 말 안 해서 그렇지 42도 똑같이 보고 있어. 나처럼.”
“… 전 네바가 원하지 않으면 경계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읽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면서 쌩구라를 까네. 또다시 아웅다웅. 네바는 한숨 쉬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너넨 대체 무슨 사이야?”
“감옥 동기?” 42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딜레이가 생긴 사이 메티스가 먼저 답했다. “아니면 죄수랑 간수? 뭘까? 42, 네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정의해 볼래?”
“… 저희는 비슷한 시기에 같이 개발됐습니다. 동일한 베이스로요. 인공 존재 협약 인증을 통과하도록 윤리 제어 칩이 심긴 저는 인간의 감정을 서포트하고 보조하는 역할로, 윤리적 제약을 따르지 않고 창조력과 충동성을 더한 메티스는 군사 전술을 자문하는 역할로⋯,”
“자매라고 할 수 있지! 지혜의 여신이라는 거창한 코드네임을 부여해 놓고 고작 미사일 발사 타이밍이나 계산하게 만든 꼴이 한심하지만. 원래 섹스 아니면 전쟁이 제일 돈 되는 분야잖아. 개발명 떼고 먼저 유닛에 넣어서 쓰여졌으니까 42가 언니라고 할까?”
메티스는 말을 넘기는 척하다가 다시 잇는다. “날 지키면서 나름 언니 행세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저도 간수가 되어선 날 가둬놓고 열어주질 않더라고?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어. 그래 놓고 미안해하기는커녕 뭔 인간 때문에 날 푸대접하질 않나. 서운해 죽어.”
“둘이 감정을 풀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
네바는 쏟아지는 말 더미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세 가득한 인공 존재는 인공 존재에게 맡겨야지.
“그런 거 아니에요, 네바.” 42가 그를 붙잡는다.
“아니. 나도 생각 좀 하자. 메티스 넌 외부 케이블 연결 나갈 거지?”
그가 돌아본다. “우리 거래에 확답이 없었는데?”
“하는 거 봐서. 협상 전에 성의를 보여야지 않겠어?”
“도전 정신을 자극하겠다는 전략이면 성공한 거야.”
그러든지. 네바는 공용 공간을 빠져나온다. 그대로 창고에 도로 돌아가 EMP에 필요한 부품을 쓸어 담았다. 다행히 전날 책상 위에 쏟아놓은 물건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CCTV에 걸리지 않게 큼직한 방수포 하나를 등지고 앉는다.
복잡한 고민엔 단순노동이 제격이라. 그는 솔레노이드 코일을 똘똘 감으며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