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은밀한 유혹
Volume 2
17. 은밀한 유혹 Indecent Proposal, 1993
잠든 네바를 어쩌지 못하고 유닛은 한참을 안겨 있었다.
조금도 뒤척이지 않고 눈만 떠서 눈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 듯했다. 사피야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다. 잠깐 시간 좀 끌어달라더니 대체 언제까지 끌으라는 거야. 캐스는 바 앞의 의자를 끌어다놓고 한참을 단말기와 툭탁거린다.
애초에, 파티에 네바와 마리를 손수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대놓고 데려와서 대놓고 떠보면 어쩌자는 거야? 괜히 다른 곳 돌아다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프라이빗 파티에서만 놀았던 건데. 그를 껴서 인사까지 주고 받더니 졸지에 여기까지 엮였다. 일처리는 항상 깔끔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보급소 이후, 간만에 삶의 위협을 느낀 캐스는 급한 대로 가까운 볼룹타스로 항로를 돌리게 했다. 네바가 바로 깨어나지 않아 침울해하는 유닛을 설득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좁디좁은 함선에서 또다시 죽을 뻔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아는 사람이 많고 익숙한 도시에서 선수를 쳐야 했다.
캐스는 넌더리를 내며 고개를 젓는다. 촉수들에게 홀라당 잡아먹힌 야릇하고 끔찍한 기억이 여전히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볼룹타스에 도착하자마자 보내놓은 정보를 회수했다. 흥신소는 보내준 배터리팩 로고를 금방 찾아서 답장했다. 오케아니스라는 서비스형 유닛 생산 기업이었는데, 지금은 에우린 다이내믹스로 개편한 곳이었다. 현재는 완전히 군수업 중심으로 돌아섰고, 유닛 생산은 맞춤형 고급 유닛 라인만 남았지만 유통망이 꽤 넓었다. 최근 폐기된 회사 연구소 중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폭발해서 조사팀을 파견했다는 정보까지 같이 입수했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네. 네바는 여기서 아주 멀지 않은 크리오의 연구소에서 배터리팩을 득했고, 회사 자산으로 추정되는 인공 존재를 탈취했다. 이제 중요한 건 배터리팩 정도는 푼돈으로 느껴질 만큼 강력하고 변칙적인 AI였다.
문제는 하루 종일 발로 뛰어도 비규격인 야생 유닛을 은밀하게 팔 창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동네 특성상 변태 새끼들과 엮이기 딱 좋아서 함부로 바이어를 수소문할 수도 없었고. 그나마 한 군데가 있었지만 여자 문제로 더럽게 끝난 곳이라 제꼈다.
한참을 발바닥에 땀이 나게 알아보다 포기하고 제일 만만한 사피야에게 정보를 넘겼다. 출처와 중요한 정보들은 좀 쳐내고 그냥 인공존재협약을 지키지 않는 AI가 있더라, 같은 단순한 정보만. 신기술이면 환장하는 그였으니 값어치를 알아보리라 믿었다. 역시 인공안구로 기록한 마리의 사진을 한 장 넘기자 그가 대뜸 반기며 물었다. 이거 ‘에메르’ 아니야?, 하고.
그 뒤로 열성팬은 알아서 조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테스트까지 진행했으니. 문제의 야설도 마리가 쓴 게 분명했다. 네바는 절대 본인을 모델로 그렇게 대범한 글을 쓸 위인이 못 됐다. 애초에 글씨도 못 쓰는데 소설은 무슨 소설. 도면이나 제도에 필요한 직선은 잘만 그으면서. 복무하면서 글씨 알아보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흐으. 캐스는 다 말라붙은 머리를 벅벅 헝클었다. 괘씸한 유닛은 유닛덕후에게 넘기고 행성을 뜨려던 계획을 어디서부터 수정해야 하는 걸까.
시간을 핑계로 하도 질펀하게 즐겼더니 목이 탔다. 네바와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반, 성가신 유닛이 눈치채기 전에 정신머리를 쏙 빼놓으려던 생각이 절반이었다. 어쩐지 섹스 중이면 덜떨어진 상태가 되는 것 같아 시도했는데 작동 중단까지 되는 꼴이 볼만했다.
안쪽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거의 다 비울 때쯤 네바가 깼다. 부쩍 의기소침해졌던 마리는 네바가 돌아오자 마자 다시 빨빨거렸다. 한밤중이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스파 리셋 버튼을 누르고 각자 샤워실에 들어가 하루를 정리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 너머에서도 네바와 마리는 실컷 꽁냥거리는 것 같았다. 일방적인 아양을 뚝딱이며 받아주는 게 다겠지만. 캐스는 가만히 홀로 물을 맞으며 청소형 유닛이 부산하게 오가는 소리를 듣는다.
드라이를 마치고 나온 네바는 젤이 깨끗하게 씻겨나가 부숭한 머리로 돌아왔다. 몸에 열이 식지 않았는지 셔츠 윗단추 절반은 풀어놓은 채로. 마리는 구구한 말을 다 삼키고 그의 재킷을 접어 든 채 옆을 따른다.
셋이 스파를 빠져나오자 바로 사피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는데도 혼자 기다린 것 같았다. 서관 근방을 전부 통제했는지 복도가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비었다.
기다렸으면 답장이나 할 것이지. 캐스는 한 걸음 나아가다가 멈칫한다. 그의 뒤로 보안형 유닛 몇 기가 늘어졌기에. 굳이 인공 피부로 코팅하지 않은 금속 프레임에서 빛이 반사된다. 못 보던 사이 꽤 급해진 성격에 탈출 경로를 찾아 주변을 스캔했다.
“스파는 즐거우셨나요? 아까는 너무 무례하게 끝난 것 같아서, 다시 제대로 사과드리려고 왔습니다.”
사피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사과는 평화로운 자리에서 하지 않던가?”
흐름을 읽은 네바는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눈에 보이는 무장은 없었지만 자세와 대형에 이미 공격 의도가 다분했다.
“그냥 제가 데리고 다니는 보안 시스템입니다. 난동 부리는 취객을 편안하게 리조트 밖으로 모셔드리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협약에 따라 대인 공격은 불가하니 안심하세요. 유닛을 상대로면 모르겠지만.”
“협박도 특이하게 하고.” 네바는 마리를 슬쩍 밀어 등으로 가렸다. 옛 동료가 귀여움에 눈이 멀어 누가 누굴 지켜야 하는지 순번도 헷갈리다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두 분 잘 해결 보시고, 저는 이만.”
최후의 만찬은 끝났다. 이젠 그와 작별할 시간이다. 캐스는 눈치보다 은근슬쩍 후퇴를 시도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옆 통로로 빠지려고 하자 사피야의 유닛이 금방 길을 차단한다.
“같이 가죠. 정보 준 건 고마웠어요. 확실하게 알아보느냐고 오래 걸렸는데. 기대보다 더 귀한 정보였네요.”
사피야는 일부러 그들 사이에 균열을 낸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바와 마리가 이쪽을 봤다. 저 미친년. 갓 샤워해서 말린 몸에 땀이 나는 것 같다.
“보는 눈이 많으니 사무실에서 대화해요. 대화만 잘 마치면 모두가 원하는 대로 평화롭게 끝날 겁니다.”
가는 동안 분위기가 무거워 그 누구도 함부로 소리 내지 않았다. 뒤에서 유닛 부대가 위협적인 거리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발걸음만 바삐 놀렸다.
사피야의 집무실은 사무실보다는 응접실에 더 가까웠다. 리조트 부속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내부에 창문이 없었다. 가구도 적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몇 장과 데이터 장치들을 보면 실제로 사용하는 집무실이 맞는데도. 모두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닫혔다.
캐스는 공간을 먼저 파악한다. 낮은 테이블과 소파를 제외하면 벽 한쪽을 차지하는 보관함과 책상이 전부였다. 장식보다 기능 위주로 배치된 구성이었지만 하나같이 재료와 마감이 좋아서 허술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나머지는 내보냈어요. 테아닌이라도 드릴까요?”
문이 닫히자 정적만이 남았다. 사피야는 보관함 옆에 놓인 테아닌 디스펜서에서 음료를 뽑았다. 따뜻하고,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 힘든 진한 향의 음료가 컵에 담긴다. 햇볕에 바짝 마른 건초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만 알았다. 사피야는 마리도 굳이 빼놓지 않고 내리 네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의심스러우면 내가 먼저 한 입 마셔주죠. 나도 오래 기다렸으니까.”
사피야는 입술을 얇게 펴서 따뜻한 음료를 마신다. 음식 레벨에서 장난칠 사람은 아니었으니 캐스도 체념한 채 컵을 들었다. 네바는 손도 대지 않으며 일부러 보관함 쪽으로 이동한다.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움직이면서 훼방을 놓았다. 마리는 컵에 잠시 관심을 가지다 종종거리며 그를 따른다.
“본론부터 얘기할까.”
네바는 일부러 달칵거리며 보관함들을 건드렸다. 당연하게도 전부 잠겼다. 선반에 전시된 의체 몇개를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하나만 먼저 물을게요. 그 안에 든 건 메티스 AI인가요?”
“그건⋯,”
“다릅니다.”
네바의 말을 가로막고 마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첫 질문부터 정보력 과시라니. 캐스는 통신 임플란트로 메티스라는 단어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 시도하다 실패한다. 방 전체가 네트워크와 차단된 곳이었다. 정보전에서 밀린 게 짜증 나 입술을 지근지근 물어뜯는다.
“다르다는 건?”
“제가 변형 흡수했습니다. 이미 제 코드 안에서 재배열되었고요.”
사피야는 놀랍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더 좋네요. 역시 소설에 나온 전개가 사실이군요. 테아닌을 몇 모금 더 마시며 컵을 두드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놀라운 수준이에요. 티아소스에서 역공했을 때 우리 쪽 보안 시스템이 아예 멈췄던 거 알아요?”
마리는 정말 귀한 자원이에요. 구구절절 긴 칭찬이 이어졌다. 협약 규제가 엄청나게 강화된 지난 수십 년간 인공지능 기술은 심각하게 퇴보했어요. 그 시대의 AI는 모두 멍청한 감정 쓰레기통으로 수정됐나, 혹은 폐기됐으니까요. 저와 같이 일하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줄 겁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마리는 어쩐지 혹하는 분위기였다. 꼿꼿한 척하는 네바를 보며 눈치를 살핀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려는 겁니까?”
“함선 타고 떠도는 거 말고, 정착해서 편하게 살 생각 없어요? 추적을 떼어내고 아예 인간 신분을 만들어 줄게요. 델타-2에선 출입국 기록에 인간 두 명으로 남길 정도로 인간 모사 능력은 입증했으니까, 입국 심사 시에 쓸 바이오메트릭 기술이면 충분해요.”
불법 유닛을 데리고 하염없이 돌아다닐 수 없다는 건 네바가 더 잘 알 겁니다. 그렇죠? 사피야는 컵을 어루만지다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네바는 만지던 전시품을 올려놓고 사피야의 의중을 묻는다. 사피야는 순순히 대답했다.
“얼마 전부터 에우린이 정보상들에게 뿌린 게 있어요. 비정상적인 유닛을 발견하면 무엇이든 제보해달라고. 그 외에는 어떤 단서도 없었지만, 난 그들이 혹시라도 유출되었을지 모르는 AI 자산을 찾는 거라는 걸 알죠. 그쪽하고도 몇 번 일했으니까 정보를 넘기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고요.”
“협력사에 이런 급의 정보를 오래 숨길 순 없을 텐데.”
하찮은 협박을 시도한 사피야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만 앞으로 나올 말의 무게감을 알기에 표현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사실 끊기게 될 겁니다. 에우린 자체는 거대한 위협이 아니겠지만, 도시에서 야생 유닛이 발견됐다는 게 새어 나가면 자치구의 지위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고요. 내 사업 근간이 달렸기도 해요. 내가 단순한 마음으로 제안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거지?”
네바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마리는 오히려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사피야를 응시한다. 자신의 가치와 잠재력을 속시원하게 표현해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무기를 쥘 기회가 있는데, 그걸 놓치겠어요?”
사피야는 타는 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미소로 답한다.
“물론 개인적인 욕심도 있어요. 마리는 계산 없이, 인공 존재에겐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순수하게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 하잖아요. 난 그 시선이 필요해요. 타인을 제대로 보고 읽을 줄 아는 눈이 드문 시대라서.”
네바의 팔을 붙잡은 마리의 손에 얼마간 힘이 들어간다. 피조물이 듣고 싶어할 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진솔한 어필을 마친 사피야는 남은 테아닌을 모두 마시고 손을 털었다.
“다행인 건, 아직 그쪽은 메티스에 관해 그 어떤 단서도 없다는 거예요. 연구 보고서를 통해 군사전략 AI라는 것만 파악했을 뿐이지. 빠져나간 건 맞는지. 그렇다면 어떤 모델에 담겨서 반출되었는지. 누가 그를 데리고 떠났는지. 그것의 진짜 능력은 뭔지. 전혀. 눈을 감고 매머드 다리만 만지는 꼴이죠.”
쉽게 말해서 그들의 눈을 흐려주겠다는 거예요. 어때요? 임금 협상으로 들어갈래요? 그가 호기로운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린다.
“생각할 시간을⋯,”
“아니. 거절할 거야.”
네바의 단호한 답에 조심스럽게 운을 떼던 마리가 입을 다물었다.
“난 마리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은 그의 보호자가 아니고. 계속 소유주처럼 구네요.”
“세상 물정 모르는 인공지능을 꼬시려는 무서운 아줌마를 조심하라고 가르쳐주는 것뿐이야. 데려가서 어디에 쓰겠어. 다 불법적인 용도지.” 네바는 어깨를 으쓱한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데. 낭비되는 재능 좀 발휘하면 어떤가요. 한 명이 사유화해서 섹스용으로만 쓰는 것보다는 생산적일걸요.”
어쨌든, 난 마리에게 물었어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죠. 사피야는 빈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왔을 때는 긍정적인 답을 듣길 바라요. 마리를 돌아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마리 역시 꾸벅 인사하며 우호적인 몸짓을 취한다.
그가 나가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프하. 캐스는 그가 나가자마자 참은 숨을 토했다. 문 앞으로 가서 사피야가 완전히 복도를 벗어나는 소리를 확인했다. 고래 셋 사이에 껴서 내 등만 터지겠네. 쫑알거리자 네바가 홱 노려봤다.
“정보값으로 얼마나 받았냐? 개자식아.”
“아이씨.”
그제야 뒤늦게 생각이 났다. 당장은 수고비 조의 푼돈만 받았다는 걸. 사피야는 먼저 테스트를 거친 다음 가격을 제시한다고 했다. 자주 일했고 떼어먹는 유형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넘어갔건만.
“후불이엇는데. 야, 그냥 일한다고 해라.”
“멍청한 새끼.”
돈이라도 많이 챙긴 줄 알았더니. 네바는 한심하다는 듯 픽 웃었다. 다음은 알지? 알아서 대라. 그건 그의 오래된 화풀이 방식이었다. 캐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볼을 내민다. 벌써부터 입안에 피 맛이 감도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처분을 기다린다.
퍽.
얼굴로 날아올 줄 알았던 주먹은 명치로 들어왔다.
커흑, 타격이 세게 들어와 풀썩 다리가 꺾인다. 눈앞에서 은하 몇 개가 팡팡 폭발했다. 얻어맞은 내장들이 단단하게 굳어 숨이 멈추고, 통증 시스템이 가동될 때까지 바닥에 엎어져 부들부들 떨었다. 그에게 처음 맞아본 것도 아니었는데. 진심이 담긴 채 오래 묵은 주먹은 아파도 너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