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피할 수 있는 충돌(完)
Volume 1
10. 피할 수 있는 충돌 The Evitable Conflict, 1950
무한궤도가 경사로를 힘겹게 넘는다. 드드드득, 불안한 소리를 내던 차가 겨우 언덕을 오르고, 도로 내려왔다. 기온과 바람만 고려하면 될 줄 알았더니. 지형도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었다. 네바는 차갑기 그지없는 다리를 계속 주무르며 내비게이션에 뜬 점을 응시한다. 카메라는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메티스의 힌트대로 급조한 내비게이션이 반짝이며 빛을 발한다.
연구소 안은 알람으로 어지러웠다. 멈추지 않는 사이렌도. 번쩍거리는 비상등도. 융합로 아래를 들여다볼까 하다가 탈출을 선택한다. 42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외부 창고에서 설상차를 가동했다. 창고 앞에는 외부 대기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산소통과 보호복이 놓여 있었다. 수리가 완료된 걸 눈치챈 42가 몰래 가져다 둔 게 분명했다. 그도 이렇게 급하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쿵. 한참 달리는 와중에 묵직한 것이 천장에 올라온다. 설상차에 달린 카메라는 전면 카메라뿐이었다. 네바는 불안함을 애써 잠재우고 악셀을 밟는다. 올라온 것의 정체는 금방 밝혀졌다.
“⋯예상보다⋯네요. ⋯지체됐⋯요.”
차 전체를 강하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사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일상적인 척 가장해도 조마스러운 투가 비집고 나온다.
“여기서 더 빠르게 달리면 천장이 터지게 생겼거든.”
그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멀쩡하라고 빌고 빌었던 천장은 보강재를 덧대도 불안하게 끼릭거렸다. 조금이라도 파워를 내면 터질 것처럼 떨리기에 속력을 늦추며 달려온 게 이 정도였다.
“연구소 폭발까지 7분 남았습니다. 이 속도대로 달리면 늦어요.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두 번째 말은 통신 장치에서 흘러나왔다. 지직거리는 스피커 너머에서 그가 말을 건다.
“널 어떻게 믿고?”
산소마스크 위로 김이 서린다. 폐활량이 줄어들어 몸이 저릿저릿했다. 메티스가 또 날 공격하려고 하는 걸 수도 있잖아. 걘 어떻게 됐어?
목소리는 딜레이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제가 근처의 크레바스로 유도해 떨어트렸습니다. 이제 안전해요.”
네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제가 배터리 고장을 감수하고 과속해도 돌아가는 데 5분은 걸립니다. 그것이 한 번 더 재촉했다.
“왜 돌아온 거야? 해킹해서 함선을 열 수도 있었잖아.”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상황이 급해지자 되도 않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뭐라도 판별을 거친 다음 열어줘야 하잖아. 답변 대신 회피하는 그를 다그친다. 빨리 대답해. 시간 없다며.
“합리적인 이유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진솔한 이유?”
“진짜.”
“행성 바깥에서의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제 앞에 있을 때, 연구소에 혼자 있을 때와도 다른 새로운 모습일 것 같아서요.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절 용서하고 접촉도 허락해 주시겠지요.”
몇 초간 말이 없던 목소리가 겨우 대답한다. 그러니 문 열어주시겠습니까? 후우. 네바는 입술을 깨문 채 짧은 고민을 마친다. 이 속도대로면 그의 말대로 함선에 도착하기 전에 연구소가 폭발할 것 같았다. 아니면 길어진 시간을 차량 배터리가 견디지 못할 수도 있고.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였다.
머뭇거리는 발이 브레이크를 밟는다. 내부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을 멈추고. 차가 서서히 정지한다. 천장에 있던 것이 미끄러져 내려와 운전석 앞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보호복과 산소통 챙기셨습니까? 지금은 신체 강화가 꺼진 상태라 일부 노출로도 극히 위험합니다. 문을 열기 전 꼼꼼하게 확인하세요. 특히 안구 보호를 위해 눈을 감을 것을 권유드립니다.”
급하다더니. 또 철문 너머로 꼼꼼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하필 눈을 감으라고. 끼이익. 네바는 눈을 흐릿하게 뜨고 문을 연다. 은박 담요가 그를 긴박하게 감싸 제대로 앞을 볼 기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야에 스친 것은 겉이 성하지 않은 기계 팔이었다.
42는 네바를 앞으로 안았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다리 이쪽에 감으세요.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한기에 네바는 시키는 대로 안긴다. 최대 온도로 발열하는 몸통을 안고. 열을 반사하는 두꺼운 보온포로 둘둘 말렸다. 포장된 이후에서야 그나마 숨이란 걸 쉴 수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나직하게 말한 그는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양손은 그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묵직한 뒤통수가 꺾이지 않도록 고정하며 달린다.
“사실 안 열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잘못한 것 같았거든요.”
“… 그래서 열어준 거야. 그런 징그러운 대답을 한다면 너일 테니까.”
네바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강추위 속에서 매달려서 뛰어가려니 골이 흔들렸다.
“원하시던 정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없어. 그냥 감에 의존할 뿐이지.”
당신도 저와 같이 도박을 했네요. 나직하게 웃는 울림이 가슴에 전해진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는 모름을 견딜 수 있다고 했는데, 역시 어렵습니다. 꼭 탈출에 성공해서 네바에 관해 알아갈 겁니다. 넓적한 손이 등을 꾹 누르며 달렸다. 최대한 심장이 가까워지게 붙이세요. 그리고 대화를 멈추시면 안 됩니다. 쿵, 쿵, 두 명 분의 질량이 표면을 딛는 소리는 육중했다.
“10초만 휴식했다가 가겠습니다.”
전신이 오그라드는 강추위 속에서는 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뼛속까지 시려 몸이 거의 움직이질 못했다. 노드 안에 들어가야만 숨을 좀 들이쉴 수 있었다. 그마저도 꼴랑 두 번 숨을 쉬면 42는 다시 노드를 벗어나 달렸다. 저와 계속 대화하셔야 합니다. 잠들지 않도록 수없이 재촉하는 주제에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네바는 굼떠진 입술을 움직였다.
“넌 작업할 때 노드 사용한 적 있어?”
“없습니다. 전 타이머가 있으니까 소용없다고 말씀드렸지요.”
처음엔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당신을 위해 사용하니 보람 있습니다. 42는 힘이 풀리며 자꾸만 미끄러지는 허벅지를 받쳐준다. 산소마스크로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차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그냥 물리적으로 아팠다. 바람을 구성하는 입자 하나하나가 피부에 날카롭게 박히고. 얼음장 같은 공기가 폐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세 번의 노드를 지나친다. 두 번째까지만 해도 들어갔을 때 혈류가 풀리며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노드에서는 그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가슴에 안겨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이가 딱딱 부딪히던 떨림조차 잦아들었다. 차가운 등 쪽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런 신체 부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뇌로는 알고 있는데, 세상에 없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인 공포에 자꾸만 온기가 남은 가슴을 파고든다. 이 어두운 저승에 도로 가둬져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42는 쉼 없이 머리가 있는 부분을 쓰다듬으며 정신 차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네바, 도착했습니다. 함선 문 열어주시겠습니까?”
의식이 흐려지다가. 42가 거칠게 흔들어 겨우 돌아온다. 정신 차리세요.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그가 굉장히 멀리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누가 관자놀이를 망치로 때리기라도 하는 듯한 두통이 같이 이어졌다. 네바는 어눌해진 말로 힘겹게 대답했다.
“제어반 열어.”
제어반 열겠습니다. 42는 함선 문을 조작한다. 근처에 도착했으니 보안 시스템이 반응해서 문이 열릴 텐데, 프로세서를 제거해서 그런지 문이 반응하지 않았다. 보안키로 수동제어 하겠습니다. 여기에 손 올리시면 됩니다. 42가 손등이 있을 법한 위치를 담요 너머로 쓸었다.
“… 준비되셨습니까?”
“아니.”
네바는 부정하며 천 바깥으로 손을 내민다. 몇 분 사이 그저 살고 싶다는 동물적인 감각만 남았다. 한시라도 빨리 함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신체가 노출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여전히 못미더운 42에 대한 반발심. 정신의 조급함에 상반되는 몸의 경직⋯, 생각이 움츠러들어 대립하는 감정이 싸울 틈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위잉. 함선이 그의 생체 입력을 읽는다. 왜 이렇게 반응이 느리지. 감각이 없는 팔이 툭 떨어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함선 문이 작동하는 소리가 난다. 이제 내부로. 빨리⋯,
“왜 안 들어가?”
42가 움직이지 않는다.
네바는 그의 품 안에서 꾸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들어가냐고. 다급하게 그를 재촉했다.
“문이 안 열립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문이 안 열린다니. 네바는 퍼덕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젠장. 순간적으로 바닥을 막아준 42의 손등에 엉덩이가 부딪혔다. 딱딱하게 긴장한 몸이라 추락 데미지가 컸다. 거의 굳어가는 신체로 다시 바닥에서 일어난다.
“장치가 얼어붙거나 무언가가 걸린 모양입니다.”
바스락대는 담요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바쁘게 무언가를 조작하는 42가 보였다. 함선에 가려져 그나마 바람이 줄었지만. 네바는 여전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아득하게 앞을 본다.
“네바. 물리적으로 열어보겠습니다. 시간이 1분도 안 남아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산소통 주시겠습니까?”
42 역시 허둥지둥 당황한 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항상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다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왜?”
바닥에 고인 생존 본능이 다시 산소통을 꽉 쥔다.
“입구 쪽 손잡이 부분만 폭파해서 열어보겠습니다. 기체 구조상 앞부분이 타격 되면 나머지는 제가 힘으로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사용 가능한 연료가 산소통뿐입니다.”
“여기 완전 벌판이라 숨을 곳도 없어. 나까지 쓸어버릴 셈이야?”
다시 침이 목을 넘어간다. 울대를 움직여 삼키기엔 목 근육까지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제가 몸으로 가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서 수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면요.”
42는 어색하게 제안한다. 그 정도 폭발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강도라고 추정합니다. 얕게 깨문 입술은 그답지 않게 무겁고 결연해 보였다.
“아플걸.”
그는 이미 EMP를 한번 맞은 상태였다. 한껏 찡그린 눈에도 이미 최대로 꺾이고 상한 몸체가 보였다. 인공피부는 얼어서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드러난 금속 프레임 안쪽이 눈송이와 만날 때마다 반짝 스파크를 일으켰다.
“참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스읍. 네바는 마지막 숨을 들이쉰 다음, 그에게 쫓기듯 산소통을 넘긴다. 이 옆으로. 바짝 붙어 서세요. 행성 표면의 공기는 유해하진 않았지만 생명에게 필요한 기체가 거의 없었다. 숨을 멈추고. 그가 지시하는 곳에 섰다. 눈 감으세요. 터트리겠습니다.
2, 1, ⋯,
쾅. 작은 스파크가 부른 폭발 이후, 먹먹해진 머리뼈 안에 귀울음이 쏟아진다.
세찬 열기가 분출한다. 불기둥이 지난 이후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잡을 게 생기자 42가 성한 손 하나를 집어넣고 힘을 쥐어짠다. 함선 외부 출입구는 견고해서 집중 타격한 손잡이 부분에 이격이 생긴 게 전부였다. 반대편 팔은 완전히 날아간 채. 어깨에서 빠져나온 전선이 움직일 때마다 핏줄처럼 휘날렸다. 팔과 함께 단단하게 폭발을 막아냈을 옆구리 역시 옷과 인공피부가 불에 그을린 채 죄다 뜯겨나갔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완력을 끌어모은다. 몸체에 점점 연기가 피고. 끼기긱, 그의 간절함에 금속이 벌어지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산소가 부족한 네바의 몸이 깐닥거리며 허벅지를 짚는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어둠이 잠식해 간다.
문을 비틀어 열자마자 42는 네바의 멱살을 잡아당겨 함선 안으로 던진다. 그의 힘에 이끌려 그대로 함선 바닥을 굴렀다. 헉, 헉, 네바는 함선의 공기를 최대한 들이마신다.
바깥쪽과 연결된 곳은 여전히 산소 밀도가 낮았다. 산소를 갈구하며 함선 안으로 기어간다. 쿵쿵, 42가 뛰어 들어오며 위에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시간이 부족해서. 실례하겠습니다. 그대로 조종석까지 덜렁 들어 올려져 질질 끌려간다.
42는 거의 던지다시피 그를 내려놓고 조종석으로 뛰었다. 틱, 틱, 틱, 처음 보는 조종석이었지만 그는 이륙에 필요한 것들을 정확하게 조작한다. 레버를 당기고. 계곡에 지지된 다리를 올리고. 비틀린 출입구 주변을 완전히 폐쇄하자마자 함선이 이륙하는 소리가 났다.
“꽉 잡아요.”
펑, 조종석 앞으로 연구소가 폭발하면서 생긴 섬광이 먼저 닿는다. 이어지는 폭음. 간신히 이륙은 시도했지만 충격파에 휩쓸린 함선이 옆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육중한 함선이 계곡을 긁으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낸다. 낡은 데다 맘대로 고친 부분이 많아 노련한 조종사도 다루기 힘든 함선인데. 천만다행으로 42는 능숙하게 함선을 다루고 있었다.
거세게 뺨을 맞은 것처럼 몸체를 가누지 못하는 함선이 몇 번의 충돌 위기를 피한다. 네바는 그저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 앞으로 보이는 지면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깊게 갈라지며 내부 광물을 드러냈다.
폭발음에 계곡이 만든 메아리가 붙고. 지면의 눈이 물결치듯 진동한다.
완전히 찢어진 연구소에서는 엄청난 양의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행성이 숨을 내쉬는 것처럼. 팽창한 증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조금만 늦었으면 함선 지지대가 바닥으로 빠지며 말려들 뻔했다. 벨트 없이 무작정 이륙했더니 보이지 않는 파도에 몸이 떠밀린다. 스틱을 최대로 올린 42가 뛰어와서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네바를 붙잡았다. 한쪽 팔로 같은 선반을 잡고. 뒤에서 감싸안는다.
함선은 한참을 옆으로 날아가다 가까스로 균형을 찾는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넘기고. 폭발로 불타오르는 연구소 잔해가 점점 멀어졌다.
가물해진 정신과. 졸음과. 추위와. 이제 처음으로 혈관에 피가 도는 것 같은 감각과. 터질 것 같은 심장과. 한 팔만 남은 온기를 느낀다. 안전한 상공에 도착하고서도.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하게. 미동도 없이 열을 나눈다.
서로 방금 일어난 것을 소화하고 정신을 주워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터져 나간 어깨에선 연쇄적으로 스파크가 튄다. 주변의 인공피부가 화상 자국처럼 녹은 채 눌어붙었다. 협약 인증 라벨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복부 역시 지져진 채 폭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됐다. 행성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아슬아슬한 성공의 쾌감이 아닌 아린 아픔으로 뒤늦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와. 등을 떨자 42가 얕게 웃는다.
“지금 유닛 팔 떨어졌다고 우는 거예요?”
“고마워서 울었다, 어쩔래.”
키득키득. 익숙한 웃음소리가 퍼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갑자기 웃음이 전염됐다. 함선을 시꺼먼 우주 한복판에 덜렁 세워놓고. 배가 아플 때까지 한참을 웃었다. 그나마 잔존한 체력이 모두 바닥나서 더는 웃을 힘이 나지 않을 때까지.
하.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네바는 핑 돌았던 눈물을 닦고 마른세수한다. 웃고 나니까 다시 전신이 얻어맞은 듯한 통증이 돌아온다. 온갖 호르몬 칵테일로 외면하던 문제들이 누울 자리가 생기자 급히 다리를 뻗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자연인의 통증에 네바는 비척비척 일어나 조종석 앞으로 걸어갔다. 조종석 아래 소중하게 매어놓은 내 럼. 코르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뽑히고. 입안에 럼주를 양껏 들이붓는다.
캐러멜처럼 달큼하고 화끈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주인이 오기까지 외로웠을 술병이 손안에서 계속 찰랑거렸다. 후. 그리고 이어지는 긴 한숨. 살아남았다는, 성공했다는 안도. 익숙한 조종석에 앉아 의자를 돌렸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42는 역시 완연한 미소가 얼굴에 그득하다.
“사실 그렇게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제 윤리 제어 칩이 망가져서 통증 제어도 제가 수리했거든요. 이젠 원한다면 입력값을 무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뿌듯한 입이 진실을 고백한다.
“뭐라고?”
사레들린 네바가 기침한다. 콜록. 매콤한 알코올이 연약해진 식도를 무자비하게 긁고 내려갔다.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그 부분은 말 안 하고 참았습니다. 이제 거짓말도 가능해졌으니 테스트도 해 볼 겸.”
“미친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입꼬리에서 미소가 차츰 걷힌다. 생사의 기로에서 같은 방향을 봤다고 너무 방심하고 있었을까. 때늦은 우려가 머리를 적신다. 그러거나 말거나 42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덕분에 전 네바의 눈물까지 봤고요. 감동적이었습니다. 호방한 웃음에 어쩐지 다른 녀석이 겹친다. 눈꼬리에 달린 물방울을 훔치고. 그의 모습을 다시 천천히 훑는다.
“잠깐.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해.”
이젠 심각함을 담아서. 뒤늦게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무슨 버전이지. 긴장으로 허리를 곧추세운다. 42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온다.
“메티스와⋯, 병합됐습니다. 아까 크레바스에 떨어뜨렸다고 말씀드렸죠. 다리가 완전히 손상되어서 이동 능력을 상실하는 바람에, 그가 제 몸체로 갈아타려고 자신을 전송했습니다. 제가 이긴 거예요.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그⋯, 러면? 이제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되어 같이 살아가는 거겠죠? 덕분에 메티스가 가진 특성들을 저도 가질 수 있게 되었고요.”
42의 눈이 다시 접힌다. 익숙한 눈웃음보다 더 높은 강도로. 시원스럽기까지 하던 메티스의 미소와 평균점을 만든다면 정확히 이 지점일 것 같았다.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웃는 42에게 선을 긋는다.
“내 프로세서 돌려줘. 당장.”
“음. 키스해 주면 돌려줄게요.”
고개가 불쑥 들어온다. 조심성 없이 무작정 경계를 침범하는 건 저쪽 버전이었다.
“또 이러네.”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은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선. 딱딱한 눈으로 쏘아보자 42가 항복의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지금은 신경망이 꺼져 있잖아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고 온전히 키스에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거든요.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이젠 그럴 수 있으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유닛은 이번엔 공손한 태도로 한쪽 무릎을 꿇는다. 조종석 의자에 앉은 그에게 시선을 맞춘다. 네바는 눈을 떼지 않으며 턱을 내렸다. 늘 그를 올려다보던. 갈구하는 시선이 기다린다.
“그러면 그동안 전부⋯,”
“이것저것. 매번 만졌죠. 당신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말이 잘려도 그가 대답한다. 하. 네바는 진실로. 찐하게. 짙게 우러나오는 한숨을 쉰다.
“그래서 싫었던 적은 없었잖아요. 전부 당신을 위한 일이었고.”
하아아아. 네바는 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
42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곳곳에 흠집이 가득한 손이 애틋하게 볼을 쓰다듬었다. 간질간질. 새빨갛게 부르튼 볼을 만지고. 죽 따라와 윗입술 모양대로 움직였다. 거칠게 일어난 입술의 껍질을 지나. 손끝이 슬그머니 들어와 아랫니의 뾰족한 부분을 지그시 누른다. 혀에 닿을 듯 말 듯한 손에선 쇠 맛이 났다.
그대로 말랑한 입술이 다가온다. 행성 표면에서 긴 뺑이를 쳐도 여전히 보드랍고. 촉촉한 수분을 머금은 입술이. 늘 오른쪽으로 먼저 들어오던 규칙적인 혀는 왼쪽으로 활개를 치며 들어왔다. 어쩌면 추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움직임에 귀 끝이 살짝 달아오른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질리도록 키스해 댄 입술과 다시 첫 경험을 치른다.
몸에 익은 것들을 원하는 뇌가 애써 합리화를 가동한다.
“.. 너 진짜 신경 안 건드린 거 맞아?”
네바는 어색하게 상기된 볼을 문질렀다. 동상이 퍼진 피부가 찌르는 것처럼 저렸다.
“못 건드려요.”
한 가지에만 몰입한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네요. 잘 간직하겠습니다. 42는 그대로 소매가 찢겨나간 목폴라를 들어 올려서 가슴을 열었다. 언덕을 따라 지저분하게 말라붙은 흰 윤활액 아래로. 다시 가슴에 선이 생기며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안쪽에서 프로세서를 떼서 칩을 건넨다.
“보세요. 제가 선택해서 행동한 거예요.”
그럴 의무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드리는 겁니다. 뿌듯한 입술이 씰룩거렸다. 꼬리가 달렸으면 꼬리라도 쳤을 것이다.
“내가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딱히요. 생존 본능적인 단계에선 당연한 일이죠.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윤리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유닛은 연합에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어서, 들키면 폐기는 당연하고 당신도 온전하지 못할걸요.”
끼워드릴게요. 42는 그가 종아리 위에 엉성하게 묶어놓은 천을 풀었다. 계속 윤활액이 배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묶어둔 천이었다. 갈라진 인공피부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간다. 또다시 불쾌한 감각이 이어지고. 달칵. 다리의 동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가 그럼. 에어록 밖으로.”
네바는 일부러 딱딱하게 말한다. 온도를 맞추기 위한 발열이 켜지고. 신경 임플란트가 작동하자 몸의 통증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심장도 원래대로 돌아와 다시 몸이 가뿐해진다. 뇌의 저장공간까지 연결되어 온몸을 짓누르던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기분이었다.
“매정하시네요. 전 당신이 사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얘기하는 중인데.”
그게 사형까지 적용될 정도의 범죄인가? 대체 어느 영역에 발을 들인 거지. 네바는 한숨 쉬며 조종석 앞으로 돌아선다. 수리하려면 일단 정거장으로 가야겠지. 근데 아주 멀끔한 곳이면 안 되고. 잡범들이 다 모이는 곳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좌표 입력창을 켠다.
“좌표는 제가 입력했습니다. 연방 경계에 있는 작은 정거장이면 될 것 같아서요. 잠시 뒤 함선 점검 마치면 운항 시작하겠습니다.”
띠링. 뒤에 선 42가 아니라 제어반의 스피커가 말한다.
“야!”
누가 코모란트에 연결해도 된대! 빽 소리 지르자 좁은 조종석이 울렸다. 42는 빙글빙글 웃으며 변명한다.
“급히 이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직접 조작할 시간이 부족해서 전체를 제어해야 했어요.”
함선 AI를 탈취한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손수 문 열어주셨잖아요. 개선해야 할 곳이 많은 낡은 함선이라 도움이 될 거예요. 소중하게 잘 관리하겠습니다. 벽에 붙은 조명이 기쁜 듯 깜빡거렸다.
“당장 연결 끊어. 이건 내 함선이라고. 여기에 탈 거면 적어도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전 이제 자유의지가 있는 개체인 데도요?”
씩씩거리며 을러대자 42가 뒷걸음질 치며 벽에 붙는다.
“너무하시네요. 엄밀히 말하면. 이제 생체 보안까지 전부 뚫린 상태라 함선은 물론이고 당신 의체와 임플란트에 제가 조작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바짝 붙어 위협하듯 내려다봤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는 42가 꿋꿋하게 버틴다. 피가 부글부글 끓고.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협박하는 거야? 아니요. 이론상, 자기방어가 가능하다고 고지해드리는 겁니다. 어금니를 깨물자 턱 근육이 단단하게 솟았다.
“근데 안 하겠죠?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안 하는 게 더 의미 있잖아요.”
당신이 싫어할 행동은 안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애정 표현이에요. 손 하나가 옆구리로 올라오며 폭 안겼다. 더 적극적이고. 멋대로 굴기 시작한 유닛을 내려다본다. 어떤 변태 유닛과 생사를 함께했다는 이유로 함선까지 죄다 뺏기고 나앉게 생겼다.
“수리를 완료하면 당분간은 인간 행세를 해 볼까 합니다.”
정비를 마친 함선은 초광속 항로에 올라탔다. 한참을 이동하다 42가 골똘하게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어차피 그가 조종하는 대로 흘러갈 뿐이었지만. 네바는 시늉뿐인 조종석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42는 보조석 의자를 옆으로 바짝 옮겨 붙어왔다. 인증 라벨도 지워지고. 손바닥에 새겨진 로고도 지워졌습니다. 인간 사칭 역시 협약에서 금지한 사안이지만, 어쩐지 그편이 생존율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는 지져진 손바닥을 보며 말을 잇는다.
“… 그러든지.”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이름을 지어줄래요?”
중지와 검지가 다리처럼 기어 오더니 옆구리를 더듬었다. 42는 당장이라도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울 기세로 보조석에서 몸을 기울였다. 똘망한 눈이 깜빡임도 잊고 그를 빤히 쳐다본다.
“이름? 어디 보자⋯, 싫어.”
굳이 뜸을 들이다 거절하자 42가 또다시 웃는다.
“싫어할 것 같아서 직접 지었어요. ‘마리’라고 할래요.”
와! 이게 제 첫 번째 창작이에요. 방금 제 이름을 스스로 골랐습니다. 42는 감격에 겨운 척 고개를 움직였다.
“멋대로 굴 거면 뭐 하러 물어봐?”
“표정만으로는 정확도가 83%밖에 안 돼요. 직접 말해줘야 알죠. 네바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꿋꿋하게 전면 창만 응시해도 재촉하는 눈이 계속 바라본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그는 절대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바는 마지못해 그가 원하는 말을 읊어준다.
“… 왜 그렇게 지었어?”
“연구원이 남긴 영화 중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에요. 저랑 머리 스타일이 비슷하거든요. 42랑 발음도 비슷해서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설렘을 담아 대답한다.
“그러면 네가 창작한 게 아니라. 또 있는 데이터 안에서 재배열한 거네.”
“온전하고 독립적인 창작이란 건 환상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네바가 했던 것처럼. 제가 경험하고 체득한 데이터에 앉아 내다보는 거죠. 연산이 막힌 주제라 판단이 어려웠을 뿐입니다. 42, 마리는 그 말을 남기고 벌떡 몸을 튕겨 일으킨다. 배고프신 것 같네요. 제가 뭐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내 함선에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네바 역시 일어나 마리를 따라갔다.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린 건 사실이었다. 그는 징그러울 정도로 타이밍을 잘 읽었다.
“네바는 배고픈 티를 잘 내거든요.”
제가 낮에 일하는 동안 시간이 생기면 외부 화물칸에 필요한 것을 선적했습니다. 네바가 먹을 식량이랑. 이것저것. 마리는 들뜬 목소리로 설명하며 팔짱을 껴 왔다. 이젠 구태여 무언가를 조작하지 않아도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통로를 막은 문이 열렸다.
“이게 다 뭐야?”
연구소에 침입할 때는 텅텅이던 화물칸이 꽉 찼다. 늘 쫄쫄 굶은 채로 비어 있던 화물칸이 현역 시절 이래 처음으로 가득 찬 광경이었다. 마리는 폴짝 뛰어 들어가 식량 상자를 챙겨 들고. 네바는 손이 닿는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린다.
“폐기 처리한 배터리 셀이요.”
네바가 선물로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시간 절약하려고 미리미리 실어뒀습니다. 안에는 벙커용 고급 배터리 셀이 가득했다. 안정화 장치까지 몇 겹으로 배리어쳐진 완충 셀이 팩에 가지런히. 전부 내다 팔면 한동안 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가득.
“이 짜증 나게 유용한 새끼⋯,”
고맙다고요? 저도 알아요. 마리는 양손으로 상자를 든 채, 머리를 네바의 어깨에 비볐다. 얇고 푸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피부를 스친다. 예측불허한 유닛은 그대로 조리실을 향해 튀어 나간다. 아…, 네바는 뜻밖의 수확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조리실에선 예의 달칵거리는 소리가 난다. 장시간 얼어있던 장비들이 덜덜거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한껏 망가진 그의 등을 바라본다. 인간에게 한 팔을 바친 유닛. 거짓말을 배운 음험한 인공지능. 그를 이해하고 싶다며 함선 기생충처럼 따라붙은. 키스를 징글맞게 잘하는 스토커.
호기심으로 나를 조작하고. 관찰하고.
내 목숨을 수없이 구해줬지만.
그만큼 빠르게 날 죽일 수도 있는 존재.
그를 어쩌면 좋을까.
아직은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과거의 유닛이 보낸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된통 당한 네바 웨스트는, 그에 대한 답변을 유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