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의 모든 순간
Volume 2
5. 당신의 모든 순간 The Entire History of You, 2011
#Human_Cathode
NOTE : 무례함.
여성. 인간. 신장 189cm. 근골격 밀도 강화 시술로 신장 대비 체중 무거움. 순간 출력량 제한이 없는 다리 액추에이터 탑재로 근육 피로도가 높음. 수면 습관 매우 나쁨. 계산 중일 때 기계 손가락으로 물체를 두드리는 습관 있음. 규칙적이나 해석 결과 의미 있는 신호는 아님.(최초 패턴 저장 1회)
불법 신체 개조가 누적되어 신체 불균형이 심함 : 좌측 인공안구 감지. 기본 연결 포트는 귀 뒤에 있으나 노출된 상태라 위생 불량. 포트 주변 만성 염증 흔적. 어깨에 뜯어낸 임플란트 자국. 기존 용도는 불분명.
네바와의 관계 : 군대 동기. 네바의 과거 정보 다수 보유. 네바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으나 전적으로 도구적이진 않음. 네바가 3단계 이상의 호감도를 보임. 예전 섹스파트너 사이로 추정됨. (참고 : 일화 텍스트 기록 271줄)
전투 능력 : 상급. 범용성 유닛 공격 대처법을 정확하게 숙지함. 경추에 해킹 모듈 존재함. 코어 프로세서 위치는 우측 인공 쇄골 내부로 추정됨(약점)
(*) 협약 위반 유닛의 존재를 알고 있음.
(*) 백도어의 존재를 알고 있음. 제거 전 정보 출처 확인 필요.
- 백도어 실질 연결 가능성 : 1.6% (자체 해킹 모듈 성능 중하급)
#Daily_Task_066
-캐스 제거: 생존 유지 조건 관리(현재 조건 수 : 2)
-항법 데이터베이스 성운 좌표 업데이트
-도킹 클램프 정기 점검
-식품 재조합기 레시피 수정_버전47 (네바 식이섬유 섭취량 증가 버전)
-네바 비타민제 및 수면제 투약
-구역3 환경유지시스템 필터 교체
-함교 조명 교체 (네바가 갈겠다고 했으나 4일째 방치 중)
-오버드라이브 역류 원인 분석
“… 뭐 하냐?”
수면 상태에 가깝던 네바의 심박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이 감지됐다.
“수리.”
내 몸이 너무 걸레 같아서 봐준다고 하더라. 캐스가 먼저 대답했다. 사실에 기반한 설명이다. 그러나 배신이나 불륜 현장으로 읽히지 않도록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어떻게 대답할지 대화 전략을 수립하는 동안, 네바의 시선이 캐스의 목에 고정됐다.
“팔 캘리브레이션 문제야. 새로 단 팔에서 가끔 오류가 난다고 하네?”
분위기를 읽은 그가 대신 변명했다. 용케도 수선된 팔을 알아본다. 대답을 들은 네바는 이쪽을 봤다. 확인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캘리브레이션 문제치고 범위가 넓은데.”
그를 안심시키도록 내세울 선택지가 전혀 없었다. 인간의 목을 조른 행위는 네바의 PTSD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애써 용서받은 기회를 날리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대답해야 한다. 폭력 플레이? 정당방위? 대화 알고리즘을 총동원했지만, 보상 체계도 크게 활성화된 상태라 목소리가 버벅이며 출력됐다.
“네바, 이건⋯,”
“됐고. 넌 섹스로봇을 여친이랍시고 데리고 다니냐?”
캐스는 낄낄 웃으면서 옆에 버려진 옷을 주워 입는다. 으흠. 네바의 콧소리가 작게 접수됐다. 그가 민망할 때 내는 소리다. 다행히 캐스의 웃음이 네바를 건드리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캐스는 네바의 방어적 감정을 허무는 데에 상당히 유용했다. 나는 발견한 사실을 기록한다. 과거의 동료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네바에게 더 깊게 침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들키면 안 되니까 대외적으로 위장했을 뿐이야. 유닛인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정거장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걸 모르겠냐. 소행성이 충돌해도 자이로스코프 팽팽 돌아가서 휘청이지도 않더라.”
네바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심박수가 조금 내려왔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 수치였다.
위장했을 뿐이야. 그가 두 번째로 관계 정의를 거부했으므로, 나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유사 사례를 뒤진다. 인간관계에서 애인 관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경우. 관계를 숨기고 싶거나, 확신이 없거나, 상대방이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경우.
현재 협약 위반 유닛은 불법 신분이므로 관계를 숨기는 것이 합당하다. 일련의 사건 이후 확신을 쌓으려면 충분한 시간이 흘러야 하고. “늦었으니까 적당히 하고 자라.”
“잘 거였어. 등신아.”
네바는 주먹을 치켜세우더니 돌아갔다. 세 번째라면 방법이 있다. 네바에게 좀 더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강화 임플란트 관리도 그 일환이었다.
“안 따라가?”
캐스는 그가 떠나고 텅 빈 출입구를 보며 물었다.
“이럴 땐 그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거리를 둬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밀어내는 경향이 있거든요.”
네바가 나가고 나서야 막힌 대화가 술술 흘러나온다. 하하, 걔가 그렇긴 하지. 내려와라, 데이겠다. 툭툭 치는 손길에 허벅지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급격한 코어 온도 상승으로 신체 발열이 심했다.
“너 쟤 진짜 좋아하나보다. 징그럽게.”
캐스는 금방 관계의 비대칭을 읽어냈다. 입꼬리의 각도를 기존 데이터와 비교했을 때, 그의 조소는 비웃음보다는 연민에 더 가까웠다.
#Daily_Task_068
-캐스 제거: 생존 유지 조건 관리(현재 조건 수 : 3)
-캐스 임플란트 수리 모니터링 정보 수신
-식품 재조합기 레시피 수정_버전48
-네바 비타민제 및 수면제 투약 (재시도 사유: 캐스가 탈취함 - 다음 사이클에선 절대 빼앗기지 말 것)
-항법 데이터베이스 성운 좌표 업데이트 (완료)
-도킹 클램프 정기 점검 (완료)
-구역3 환경유지시스템 필터 교체 (완료)
-함교 조명 교체 (완료)
-오버드라이브 역류 매커니즘 분석 (보류)(사유: 하기 싫음)
“밤일은 잘해?”
당연히 잘하겠지. 끼고 사는 거 보면. 식사 도중 캣이 네바를 쿡 찔렀다. 인간 행세를 할 필요 없으니 이제 테이블의 식사는 2인분만 준비해도 됐다.
음식물 처리를 위한 체내 미생물 보관함에 수분만 보충했다. 안에서 사육 중인 발광 미생물 군집은 리소스가 빌 때 꺼내서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빛을 냈다. 랜덤하게 반짝이는 발광 패턴에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분석하고 일지를 쓰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나는 편하게 한 발 물러나 둘의 대화도 관찰하고 분석한다.
“또 쌉소리하네.”
“나도 전에 서포트형이랑 해 봤는데. 안 된다는 게 너무 많아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 엉덩이 한 대만 때려달라고 해도 윤리 규정상 안 된다고 펄쩍 뛰더라니까.”
네바는 한숨을 쉬며 리조토를 수저로 떴다. 재조합기 레시피를 새로 업데이트한 버전이라 그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핀다. 네바는 맛에 관해 명시적인 표현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므로, 비언어적 뉘앙스를 모두 분석해야 했다.
“쟤는 그런 거 없으니까 별별 플레이를 다 할 수 있잖아.”
알고 보니까 밤에 여왕님한테 계속 밟히는 거 아니야? 손도 맵던데. 캐스는 말할 때 손짓이 꽤 큰 편이었다. 나도 한 번 써봐도 돼? 아서라. 벌겋게 처맞고도 부족했냐? 네바의 표정은 시종일관 짜증이었지만, 즐거움과 유사한 영역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섞였다. 눈썹으로 역정을 표현하면서도 입꼬리는 즐거운 방향으로 휘었다.
잠자리 관련 화제는 보통 금기였는데. 새로운 표정과 정보를 흥미롭게 기록한다.
“검색해 보지 마.”
네바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부드러움보단 단호한 명령조였다. 채찍, 구두, 브컨⋯, 나는 황급히 각종 ‘플레이’를 검색하던 내부 창을 모두 닫는다. 당연히 알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는데도 먼저 답했다. 네바의 대화 전략도 변하고 있었다. 더 직설적이고, 계산 없이. “왜, 교육적인 내용인데. 방탕하게 놀던 새끼가 어쩌다 이렇게 목석이 됐지.”
“어떻게 놀았습니까?”
“말도 마. 쟤가 화약이랑 각성제에 절어서 복귀하면 그날 막사 인간들 아무도 못 자는 거야. 내가 전장에서 그런 적은 없어도 쟤랑 떡치다 뒤질뻔한 적은 있었거든.”
“지랄은.”
정찰 나가서 하다가 걸린 걸로 언제까지 허풍떨래. 욕설로 핀잔을 주면서도 웃었다. 어깨에 총 맞은 만큼 우려먹을 건데? 캐스도 함께 따라 웃는다. 네바의 미소를 저장하려다가 망설인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웃음이었다. 계산 없이 빠르고. 즉각적이고. 속내를 숨기거나 우호 관계임을 어필하는 웃음이 아닌, 경계 없는 그냥 웃음. 펌웨어에 설치해 둔 채널로 로우데이터를 낚아채 교차검증 했지만 기존 항목 아래에 넣을 곳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새로운 폴더를 만들어 감정을 재분류한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새로운 네바가 더 원본에 가까운 네바라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소 이전의, 나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의 자연인 네바.
캐스를 제거하는 것은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의 수준 낮은 해킹 모듈이 내 보안망을 통과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지만,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 고려할 조건이 너무 많다. 네바의 상심도 클 것이고, 한정된 공간이라 가해자로 금방 지목되기도 쉬웠다. 일단 네바의 백도어가 안전하다는 확증을 얻기 전까진 최대한 본래 탑승 목적인 과거 정보 습득을 마치기로 한다.
그다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사고. 그를 위한 시나리오를 짜 둘 차례였다.
#Daily_Task_071
-캐스 제거 : 생존 유지 조건 관리(현재 조건 수 : 4)
-외부 카메라 렌즈 먼지 제거 (전체 13개)
-통신 암호화 프로토콜 갱신
-네바 샤워 모니터링
-화물칸 중력 고정장치 점검
-네바 심박 기준값 재설정 (펌웨어 업데이트 이후 빨라진 회복 속도 반영)
-네바 비타민제 및 수면제 투약 (재시도 사유 : 거절당함 - 다음 사이클 재시도)
-캐스 임플란트 모니터링 정보 수신 (보류)(사유: 입력되지 않음)
-오버드라이브 역류 원인 분석 (보류)(사유: 입력되지 않음)
네바의 심박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건 코모란트 3구역의 산소 발생장치 정화 필터를 교체할 때였다. 백그라운드에서 조용히 돌아가던 채널이 알람을 뱉었다. 그의 위치를 추적하며 급히 뛴다.
생활 구역 아니고, 함교 아래⋯, 하층 화물 격납고. 네바는 외부로 바로 연결된 베이스에 있었다. 호흡수도 따라 오르고, 코르티솔은 평소 기준값의 두 배 가까이.
수면 중 이상 반응이나 운동과는 패턴이 달랐다. 이건 흥분 상태였다.
뒤이어 그의 모든 임플란트 전원이 꺼진다. 신체 강화도, 통증 관리도, 반사신경 강화도, 전부. 제발 업데이트 문제가 아니어야 하는데. 외부 침입도 없었고. 선적된 물건 때문에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초조해져 달리기 속력을 최대로 가동한다.
지하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아래에선 무언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 그리고 짧은 충격음.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