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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왼손

Volume 1

•DJG•15 min read
1권은 전체 분량을 10챕터로 나누었습니다. 이후 2-3권은 20챕터로 연재됩니다.

  1. 어둠의 왼손 The Left Hand of Darkness, 1969



day 1.

자궁. 포근한. 어둡고 아늑하고 따뜻한 자궁.

이름난 남자 시인들은 가장 가고 싶고 그리운 곳으로 자궁을 그렇게 찾아댔다. 어려지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그냥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걸까. 그런 놈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보이지도 않는 내장 기관을 왜들 그리 불러댔는지. 자궁을 가진 이들한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네바는 당연히. 자궁 따위보다. 팍신한 가슴에 안겨있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자궁에서 세포로 지내던 시절을 기억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자가 이 은하 어디에 있겠냐마는. 천국이란 어두컴컴한 장기 내부가 아니라 지금처럼 가슴이 품은 온기에 꼭 안겨있는 곳이겠지.

두 뺨이 파묻힌 곳은 가슴골이 맞는데. 어쩐지 눈이 떠지지 않는다. 잠입 중 불침번을 서다가 깜빡 졸았을 때처럼. 정신은 깼지만 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가위 상태였다. 연구소 잠입을 시도하다가 몰아치는 블리자드 안에서 기어코 얼어 뒤진 모양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몸 안에서 사투를 벌이며 가능한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젖힌다. 깊게 들이마신 숨에는 달콤한 체취가 없었고. 말랑한 가슴에 얹힌 손은 움직이질 않는다. 혹시 애매한 저승에 끼어버린 걸까. 따뜻한 가슴 천국에 가기엔 악행을 많이 저질렀고, 차가운 지옥에 가기엔 나름대로 선행을 해 버린 탓에?

가슴을 쥐거나 빨지도 못하고 그저 얼굴만 처박고 있어야 하는 저승이라니. 아주 살짝만이라도 누가 건드려주면 바로 일어날 수 있을 텐데. 눈이라도 떠 보려 모든 집중력을 한 점에 모았지만 속눈썹 한 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뺨에 닿은 살갗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명체라면 으레 있어야 하는 흉통의 오르내림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린 통증.

누가 늑골을 열어서 심장을 두들겨 패기라도 한 것처럼. 근육이 저린 고통이 엄습하자 그의 상체가 미약하게 경련했고, 덕분에 네바는 가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쿠당탕. 좁은 1인용 침대에 끼어있던 그는 몸을 움직이다 바닥으로 바로 굴러떨어진다. 냉랭한 바닥에서 비척비척 일어나자 그를 안고 있던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네바는 받은 기침을 하며 슬슬 뒤로 물러난다. 어둡게 조절된 조명 아래에서 여자가 일어났다. 상의는 온데간데없고. 얼굴보다도 동그란 가슴에 먼저 인사한다. 그에게 꼬옥 안겨있던 네바 역시 옷이 휑하게 벗겨진 상태였다.

“너 뭐, 뭐야?”

여자는 곱게 개켜진 회색 티셔츠를 주워 입고 그에게 똑같은 옷을 건넨다. 여자 가슴을 보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실로 오랜만의 일에 네바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붉어진다. 받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당황스러움에 벽만 더듬었다.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잠시 제가 안고 있었습니다. 난방 시스템이 이제 막 가동 중입니다.”

저는 unit-42.0.3 현재 오케아니스 연구소를 관리하는 유닛입니다. 다들 42라고 간략하게 부르셨지만, 편하신 대로 부르면 입력하겠습니다. 다행히 물 흐르듯 유창한 공용어가 들린다. 사십이, 또는 사이, 여자는 일어나 손을 내밀었지만 네바는 다시 이어지는 통증으로 손을 잡지 못했다. 손금 대신 회사 로고가 각인된 손바닥이 잠시 허공을 머물다 거둬진다.



끙⋯, 인공 신경으로 연결된 의족이 뻣뻣하다. 이전처럼 움직이지 못하자 42가 옷 옆에 준비된 약통을 내밀었다.

“진통제 더 드리겠습니다. 통증이 있을 거예요. 구조 직후 심장이 몇 번 멈춰서 제세동을 진행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그래도 살아서 연구소에 들어오긴 했군. 네바는 무심코 약통을 받았다가 유닛을 다시 돌아본다.

“지금 어느 연방에 속해있지? 넌 협약을 따르나?”

“오케아니스 연구소는 회사 소속과 동일하게 메이브 연방에 속합니다. ⋯저 역시 지각체 규제법에 의거한 인공 존재 협약을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면 협약 인증 라벨을 보여드릴까요? 42가 티셔츠 밑단을 슬쩍 들어 올린다. 됐어. 그는 메마른 혓바닥으로 진통제를 삼켰다.

인공 존재 협약 2장 1조, 지각이 있는 인공존재는 인간의 생명을 침해할 수 없다. 2378년 화성 AI 반란 이후 모든 연방 소속은 인공 인지 존재 및 자율 시스템을 제작할 때 엄격하게 규정된 협약을 따라야 했다. 메이브 연방이면 연합법이 충분히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었다.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춥지? 아무리 외곽이어도 골디락스 안쪽인데.”

“지구 표준해로 79년 6개월 12일 전에 대기권 상층부에서 소행성 추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표면 피해는 적었지만 자전이 느린 행성이라 낙진이 거의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조각이 대기 위로 날아가 파편 궤도까지 형성하는 바람에 항성에서 오는 빛 에너지가 거의 차단됐어요. 밤 주기엔 블리자드가 더 널뛰는데, 당신이 착륙하는 동안은 운이 좋았습니다. 지금 정도 강풍이면 아무리 움직임 센서가 동작했어도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내가 운 하나는 타고났거든. 다른 사람들은?”

“저뿐입니다. 연합법 503조 6항에 따라 조난 대상으로 분류되어 구조되셨습니다.”

약기운이 빠르게 돌며 한결 몸이 편해진다. 전기로 몇 차례 구워진 심장은 여전히 달각거리는 기분이지만. 네바는 작게 한숨 쉬며 티셔츠를 입는다. 얼었다가 녹은 피부 말단이 면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행성 방문 용건을 여쭤봐도 됩니까? 연구 중단 이후 크리오는 무인 행성이 되었으며, 생명체 거주 가능 지역은 이 연구소 내부뿐입니다.”

갑작스러운 빛 변화에 눈이 피로하지 않도록 벽에 매설된 조명이 부드럽게 차오른다.

“어⋯, 버⋯려진 연구소라고 들었어. 남은 물과 에너지가 있으면 보급하려고.” 순간적인 질문에 그는 머리를 긁는다.

“물은 보급해 드리겠습니다. 연합법에 따라 행성을 떠날 때까지 연구소 설립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제 지원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선반 위에 두꺼운 옷을 모아두었으니 챙겨서 착용하세요. 에너지 관리차 난방 구역을 순환 운영하고 있어서 연구소 안이 상당히 춥습니다. 들고 오신 옷과 소지품은 옆에 두었습니다. 42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한다. 협약 3장이었나. 모든 연방 유닛은 도움이 필요한 인간에게 협조해야 한다. 다행히 침입자나 도둑이 아니라 조난자로 분류된 모양이었다.



“그냥 가는 거야? 잡아두거나 하진 않고?”

“글쎄요. 위험한 행동을 하실 겁니까?”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하겠어?”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온 이후 생존 시스템을 조정할 필요성이 생겨서 계산이 필요하거든요. 식사는 한 시간 이후에 중앙 홀에서 준비할 테니 그때 나오시면 됩니다. 자세한 질문은 그때 나누겠습니다.”

42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는 척 잠시 인위적인 텀을 둔다.

“참. 성함이?”

“네바⋯, 네바 웨스트.”

“반갑습니다. 네바 웨스트. 저는 고립 환경에 놓인 인간을 서포트하기 위해 제작된 파브리카 유닛입니다.”

버튼을 누르자 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방 안도 충분히 서늘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리자 복도의 찬 기운이 금방 공기를 질주해 왔다. 일났군. 추운 곳이 질색인 네바는 인상을 쓰며 선반을 열었다.


시작은 가로챈 패킷이었다. 간단한 배달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마주친 통신선에서 슬쩍한. 네바는 머릿속에 저장한 연구 보고서를 열어본다. 단순한 연구보고서였지만, 그는 글자 밑에 숨겨둔 군사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퇴역하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용역 보안 수준에 발전이 없는 덕분이었다.

보고서에는 어떤 전술 무기의 성능이 담겨 있었다. 구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순 없었지만, 성능만큼은 쓸만해 보였다.

회사는 어떤 연유에선지 테스트를 중단하고 무기를 회수하지 않았다. 행성 단위로 움직이는 군수업체 성에 차지 못하는 허접한 규모라 이건가? 버려진 연구소에서 평생 썩어가기엔 유용한 성능이었다. 시간 많은 해적이 주워다 블랙마켓에 가져간다면 충분한 이목을 끌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무기.

오랜 시간을 달려와 크리오 상공에서 스캔한 연구소는 허무할 정도로 평범했다.

군사 연구소에 있을법한 보안 장치 없이 건물만 달랑. 감지되는 생명체는 우주 바퀴벌레 한 마리도 없었다. 기상 상황이 예상보다 안 좋았지만 헛수고로 치고 돌아가기엔 연료를 너무 많이 썼다. 강화된 신체가 벌어줄 시간만 믿고 냅다 착륙한 결과가 저 가슴이었다. 네바는 여전히 얼얼하고 차가운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편다.

유닛이 나가자마자 그는 가방 안에 든 패널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함선과의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악천후도 문제였지만 지형지물로 신호가 차단되는 모양이었다.

원격 제어가 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행성을 빠져나가지? 작은 가방에 필요한 물건은 챙겼지만 중요한 건 전부 함선 안에 있는데. 은하망에 도움을 요청할 대형 통신기도. … 의체 수리 도구도.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무릎 관절을 만지작거린다.

연구소는 휑하고 삐걱거렸다. 완전히 얼어붙은 공간도 많아 구석구석은 살펴보기 어려웠다. 방 몇 개를 살펴보던 네바는 도로 돌아와 선반의 잠바를 두 개 더 꺼내 입었다. 문이 아예 열리지 않는 일부 실험실과 통로를 제외하면 대부분 빈 공간이었다.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짧은 이동인데도 생각보다 피로했다. 네바는 침대에 주저앉아 욕을 뇌까렸다. 이곳은 위장한 군사 시설이 아니었다. 무기는커녕 돈이 될 전리품도 없을 정도로 텅 빈 과학 연구소. 오가는 스캐빈저들이 보고서를 읽고 날아오기 전에 일등으로 도착하려고 했을 뿐인데. 영하 120도에 달하는 지표면부터 유닛이 불 켜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연구소까지 파악한 정보 중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좀이 쑤신 네바는 일찍 중앙 홀에 진입한다. 42는 미리 와서 통조림을 가득 쌓아놓고 라벨링하는 중이었다.

“뭐야. 음식 재조합기도 없어?”

“고장 났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연구소에 생명체가 존재한 지 70년은 넘어서요. 정전과 비상 상황을 대비한 최소한의 보존 식량과 물뿐입니다.”

“상표도 다 지워졌는데.”

“화학적으로는 안전한 상태입니다.”

네바는 미심쩍은 얼굴로 통조림 몇 개를 집어서 귀 옆에서 흔든다. 안쪽에서 무언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지만 그뿐. 내용물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엑스레이나 그런 기능은 없냐?”

“일반적으로 서포트형 유닛은 탑재 기능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감정에 동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솔직해서 좋네. 멍청하다는 뜻이지만.”

“통조림은 따 드릴 수 있습니다.”

42는 으쓱하며 그가 찌르던 통조림을 가져간다. 손끝에서 작고 단단한 칼이 비죽 튀어나와 뚜껑을 자른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날카로운 단면이 금세 드러났다. 무언의 경고처럼 느껴져 네바는 은근슬쩍 자리를 고쳐 앉았다.

“… 그건 위험한 게 아냐?”

“편리를 위한 기능입니다. 그릴은 아직 작동하는 것 같은데, 데워드릴까요?”

그가 불쑥 통조림 캔을 내민다. 아악 잠깐만. 그건 고양이 캔이잖아. 대체 누가 연구소에 고양이를 데리고 온 거야. 건넨 캔에는 으스러져 곤죽이 된 생선 뼈가 완두콩 따위와 뒤섞여 있다. 나트륨이 부족한 공허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걸 먹을 정도로 배가 고픈 건 아니라 다행이군.”

“하지만 지금 가진 식량이 부족해서 먹는 걸 추천드립니다. 고양이 사료는 단백질 비율도 높아서 영양학적으로는 우수한 식량이거든요. 조리해서 맛을 완화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아. 해 봐.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알겠습니다.”

42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평범한 듯한 인상은 보기 편안했고, 동그란 눈웃음이 은근히 눈길을 끌었다. 개발 비용에 몇 대가리의 연봉이 들어갔을 얼굴이 우호적으로 굴기 위해 눈치보고 노력하는 꼴이 약간 처량했다.

거친 막노동판에서 나사 빠지게 일하려면 금속 재질이 최고였기 때문에, 말랑한 살갗까지 구현한 비싼 인간형 유닛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네바는 여전히 얼굴에 남은 가슴의 감촉을 생각하며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꾹꾹 짓누른다.



기름기 낀 덩어리가 지글거리며 끓어오른다. 냉랭한 비린내가 조금씩 다른 조미료에 덮여갔다. 통조림밖에 없는 척하더니 어디선가 재료가 하나둘 등장하고. 조리대에선 자꾸만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레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색이 짙었지만, 정말로 멀끔한 카레가 테이블에 놓인다. 리퀴드 스모크에 건조 감자까지. 반질거리는 고등어 껍질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뜨끈한 냄새에 뒤늦게 허기가 당긴다.

“이 정도면 먹어줄 만하겠네.”

네바는 생색을 내며 고양이 캔을 몇 입 떠먹는다. 엄살 부리긴 했지만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식사가 얼마나 감사한 상황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먹고 있을 테니까 연구소 브리핑 좀 해봐.”

42는 끄덕이면서 모니터에 연구소 지도를 띄운다. 외부 건물은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공간이 지하에 위치한 구조였다. 환경 유지장치가 제대로 돌아가는 공간은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고장 때문에 중간중간 통로가 끊겨있었다.

“건물 관리 AI도 터졌나? 문도 자동문이 아니네. 끊긴 영역은 어떻게 이동했지?”

“안전상의 이유로 건물 환경 전체를 통솔하는 기능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등급에 맞는 개별 보안 카드를 발급해 드리지만, 지내시는 동안은 제가 동행하며 개별 조작해드리겠습니다. 저는 환경 유지장치가 끊긴 곳도 일부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너 없인 멀리 못 움직인다 이거군. 감시하기 딱 좋은 핑계고. 여긴 뭐 하던 연구소야?”

“… 안드로이드 유닛 기능 개선 관련입니다. 저 또한 상용화 전의 프로토타입이고요. 행성 환경 연구를 위해 몇 과학자가 일부 공간을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네바는 조용히 카레를 몇 입 더 씹는다. 전기 사용량 일부가 빈다. 설계상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공간도 군데군데 비어 있고. 아무렴 외부인에게 대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겠지만.

“에너지는 뭐로 충당하고?”

“주 에너지원은 지하의 소형 핵융합로를 이용합니다. 행성 얼음에서 추출한 중수소를 이용하는데, 연료 보충은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비상용으로 벙커용 배터리 셀을 배급받아 보관 중입니다.”

“그건 돈이 좀 되겠네. 나중에 이별 선물로 몇 개만 줄래?”

42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원칙적으로 연구소 자원은 반출 불가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관 불량으로 판단한 일부를 폐기할 순 있겠네요.”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도 있네. 눈가의 살이 웃을 때마다 최적의 모양으로 움직인다. 네바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유닛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쓰레기 좀 주워가야겠군.”

그와 대화하는 동안 생선 감자죽 카레가 바닥난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마시자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했다.

“혹시 마실 건 없나?”


둘은 그나마 난방기가 돌아가는 작은 방으로 공간을 옮긴다. 벽에 덕지덕지 영화 포스터가 붙은 걸로 보아선 어떤 연구원의 숙소인 것 같았다.

온실도 고장 나서 유기물이라곤 죄다 죽어버린 적막한 연구소가 어색했다. 떠돌이 용병으로 살기 시작한 요 몇 년은 행성 표면보다 함선에서 지내는 기간이 훨씬 길었다. 사방이 웅웅대는 기계음 사이에서 잠을 청하던 그에게 고요하고 넓은 공간은 이상한 곳이었다.

42는 합성 테아닌을 따뜻하게 데워서 가져왔다. 진통제와 비타민제도 나란히. 어느 허브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급이라 맛이 제법 좋았다. 가끔 별식으로만 맛볼 수 있는 등급이라 지내는 동안 실컷 축내주기로 한다. 네바는 그와 대화하면서 최대한 정보를 탐색하려고 노력했지만, 술술 뱉는 말은 계속 표면에만 머물렀다.

행성은 생각보다도 더 열악했다. 자전 주기가 40일 가까이 되는 주제에 낮에도 눈구름 때문에 빛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20일은 캄캄하고 무시무시한 낮, 20일은 그보다 더 캄캄하고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무시무시한 밤. 밤에는 혹한기 외부 수리용 유닛도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지금은 절반쯤 지난 밤이었고, 아주 가끔 바람이 늦춰질 때를 제외하면 밖을 탐색할 기회는 낮뿐이라고 했다. 그건 꼼짝없이 열흘은 저것과 연구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극한 저온에서 일반적인 사람은 30초도 버티기 힘들었다. 강화 시술을 받은 네바 역시 기껏해야 3분이 한계였다. 42는 히터 과부하를 이용하면 최대 20분 정도는 외출할 수 있다고 했다. 통신 방해는 역시 행성 전체에 분포하는 특수 광물이 원인이었다. 전자파 왜곡 현상 때문에 언덕마다 중계기를 촘촘하게 설치했지만, 그마저도 바람 때문에 자주 유실되어 통신이 한정적이었다.

“…해서, 은하망에 구조 신호를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창하게 SOS 보내지 않아도 돼. 내 함선까지만 닿으면 알아서 나갈 수 있어.”

당장 옆 함선과도 통신이 되지 않는 건 문제였지만. 바라던 바였다. 수상한 불청객이 왔다는 소식이 회사에 전해지기 전 행성을 뜨는 게 목표였으니까.

“내 코모란트가 어디쯤 있는지 여기 지도에 띄워줄 수 있어? 코르벳급 퇴역선을 개조한 거라 크기는 작은 함선인데. 내가 계곡 어딘가에 자동 운항으로 착륙하게끔 조작해 뒀거든.”

“센서에 따르면 이쪽입니다.” 42는 지도에 위치를 마크해 준다. “바로 앞 산맥에 꽂힌 중계기가 날아가 직접 확인은 불가합니다. 마지막 중계기에서 잡힌 경로대로 라면 이 지점일 거예요.”

“그래도 멀쩡히 주차는 했나 보군. 저기까지 어떻게 가면 좋을까? 네 의견을 말해봐.”

“못 가지 않을까요? 직선거리 만으로도 1.5km나 됩니다.”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라고. 연산 좀 해봐. 아이디어 주는 게 너희 역할이잖아.” 네바는 짙은 테아닌 액을 홀짝인다.

“… 전 전략 수립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안전을 위해 동시에 운용 가능한 연산량이 제한되어 있거든요. 확산형 사고는 어렵지만 의견을 주시면 피드백을 드리겠습니다.”

“음⋯, 밖을 못 나가면⋯, 땅 밑으로 터널을 뚫으면 어때?”

목소리에서 확신이 빠진다. 말하면 말할수록 너무 대책 없이 침입한 느낌이었다. 한동안 일감이 없어서 정거장에서 수리나 하고 살아서 그런가. 5년 전의 자신이 봤더라면 탈출 루트도 확보하지 않고 뭐 했냐고 뒤통수를 탁탁 때려줬을 텐데.

“영구동토층이 두터워서 특수한 장비가 필요할 겁니다. 과학자들이 사용한 굴착기는 시료 채취용이라 성인 주먹 정도 넓이가 한계입니다. 물론 삽으로 직접 파내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혼자 하루에 10cm정도 파낸다고 계산하면 지구 표준해로 41년 정도 걸리겠네요. 삽으로는 안 파지는 암석을 만나면 돌아갈 테니 대략 50년?”

여기서 몇십 년을 썩힐 순 없어. 테아닌을 다 마신 네바는 앉은 채로 침대에 늘어진다. 몸이 나른하게 풀리고. 이곳저곳 얼얼하던 몸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다.

“근데 왜 혼자 파. 너는 안 파줄 거야?”

“저는 감정 서포트형 유닛입니다. 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42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귀찮은 것 같은데. 이런 데에서만 매정한 것.

“하. 달리기는 어때. 날 업고 내가 얼기 전에 네가 개빠르게 달리는 거지. 달리기 최대 속력이 어떻게 돼?”

“시속 15km 정도 됩니다. 영하 150도에서 8분 이상 살아계실 수 있다면 최대한 달려보겠습니다.”

잠깐잠깐 잠깐. 내가 착륙 전에 표면에서 관측한 온도는 -120도였다고. 은근슬쩍 부풀리지 마. 네바가 도로 몸을 일으켜 손을 저었다.

“밤 주기에는 온도가 계속 떨어집니다. 새벽 주기가 지나 낮이 되어야 표면 온도가 소폭 상승하고요.”

기다리시는 동안 의체 수리 도와드릴까요? 급속 동결되며 고장 난 듯한데, 제가 수리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42가 불쑥 손을 내밀어 다리를 짚었다. 네바는 그의 손이 닿기 전 빠르게 몸을 움츠린다. 유닛치고 조심성 없이 공간 침범이 크네. 길쭉한 손가락이 금방 눈치채고 허벅지를 부드럽게 도닥인다.

“죄송합니다.”

“됐어. 아마 못할 거야.”

“그래도 보겠습니다.”

다리를 들어 내밀자 42는 대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기 허벅지에 발을 올렸다. 금방 그의 성향에 맞춘 듯 섬세해진 손길이 종아리 주변을 더듬는다. 신경이 반쯤 연결되다 만 발바닥이었는데도 뜨끈하게 열이 올라왔다. 이건—

“알아. 오래됐지? 그래서 헛수고라고.” 네바는 그가 입을 열자마자 먼저 대답해 버린다.

“—수리할 순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드라이버 버전이 달라서 현재 연구소에서 보관 중인 도구로는 열 방법이 없습니다.”

“함선에 있어. 기본적인 건 내가 수리해서 쓰거든.”

“낮 주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하아. 열흘 동안 연결되다 만 다리로 여기 틀어박힐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줄래? 외부 화물칸에서 접근 가능하니까 내부 보안 키가 필요하지 않을 거야. 겸사겸사 가서 함선이 어떤 상태인지 보고도 해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접합 부위에 연고가 필요해 보이는데,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됐으니까 지금 그거 조금만 더 해. 네바는 허벅지를 톡톡 두드린다. 좀 전부터 42는 손바닥 온도를 최대로 올려 다리를 부드럽게 마사지하고 있었다. 동력이 멈춰 상온에 맞게 냉각된 의체는 너무 차가웠다. 그가 연결이 끊겨 둔감해진 인공 피부 위를 천천히 문지른다. 그 짧은 사이에 짓눌려 생긴 상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냉기였다.

“피부 위 촉각 센서는 연결된 상태입니까?”

“아마도. 좀 둔하게 느껴지는데. 온도랑 약간의 압력만 전달되는 정도? 동력 연결부가 헐거워지거나 한 것 같아. 뜻대로 안 움직이거든.” 42는 천천히 다리를 굽혔다가 펴면서 연결이 끊긴 부위를 추론한다. 이쪽은 느껴지십니까? 천천히 펴 드릴 테니 당기는 느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윽. 그래 거기. 신경 커넥터일걸. 네바는 힘을 풀고 묵묵히 그의 손길을 따른다. 그런 것 같네요. 온도를 올린 손가락이 무릎 뒤 접합부를 더듬어나간다.

“열 수만 있다면 바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 열 수만 있다면.”

“내일 일어나시면 목발을 만들어 두겠습니다. 덜 아프실 거예요.”

마사지와 동시에 손끝이 사이즈를 재듯 움직인다. 지친 네바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사이에 유닛이 주는 편안함에 익숙해진다. 정거장 허브에서 붙는 노동형 유닛하고는 차원이 다른 센스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아예 의지하고 싶어질 정도로.



42는 묵묵히 다리를 주무른다. 어느 정도 온도가 오르자 한 손은 왼쪽 다리로 옮겨갔다. 멀쩡한 신체 부위에 올라가자 손길이 더 예민해진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달궈진 돌처럼 뜨거운 손이 야금야금 다리를 타고 조금씩 올라온다.

“올라올래?”

한참 손길을 느끼던 네바가 멋쩍게 묻는다. 묵묵히 마사지를 지속하는 모습이 어떤 죄책감을 자극했다. 눈을 내리깔고 집중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람이기도 했고. 봉사도 받아 본 사람이 받는다고, 태평하게 있을 철면피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42는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입던 옷을 벗었다. 맨 처음 인사했던 가슴이 도로 고개를 내민다. 네바의 다리를 편안하게 침대에 올려주고. 곧 그가 이불을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갑자기 이런 전개. 장르가 바뀌는데. 네바는 잠시 눈을 굴리다 묻는다.

“… 혹시 감정 서포트라는게. 그거, 얘기야? 그런 용도야?”

“옷을 입고 있으면 복사열 효율이 떨어져서 벗었습니다. ‘그런’ 용도라 하심은?” 42가 팔을 뻗어 베개 밑으로 손을 넣는다. 금방 이불 안도 뜨끈하게 데워지고. 다른 손은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너 섹스로봇이냐고?”

“그게 저의 메인 기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원하시면 가능합니다. 원하십니까?”

“아니! 누가 원한대. 사람들이 주로 널 어떻게 활용했냐고 묻는 거야.”

“일부 연구원들은 해당 기능만 자주 사용하시긴 했습니다. 환경이 고되지면 정서적인 교류보다 간단하고 육체적인 위로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거든요.”



갑자기 분위기 진짜 이상해지네. 네바가 도리질 치자 베개가 바스락거린다.

“온도 더 올려드릴까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얽으며 두피를 가볍게 긋는다. 규칙적인 쓰다듬이 이어지자 이완되던 몸이 한 차례 더 나른해졌다.

“괜찮아⋯, 연구원 말이 나온 김에. 연구원들은 다 어떻게 된 거야?”

“죽었습니다. 전부.”

“그건 알겠어. 어떻게 죽었는지 묻는 거야.” 네바의 눈이 반쯤 감긴다.

“자세한 묘사를 원하시는지요? ⋯본 내용은 정신적으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육체 피로도가 높은 상태라 나중에 들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그러면 간략하게라도 말해줄래?”

“지금은 주무셨다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밤이 무척 긴 곳이니까요.”

으응⋯,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새삼스럽게 몰려오는 졸음에 네바는 눈을 감았다.

그럼 잊지 말고, 다음에 알려줘. 알겠습니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쓰다듬는 손동작이 미세하게 느려지고. 느려지는 만큼 정신도 같이 가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