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트레인지 데이즈
Volume 1
4. 스트레인지 데이즈 Strange Days, 1995
-그러면 고맙다고 키스라도 해 주시겠습니까? 42는 능숙하게 선을 넘어왔다. 인간관계가 서투른 척하는 것까지 계산된 움직임이었을까. 은행나무 식으로 물꼬를 튼 관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다. 벙커나 다름없는 황량한 건물 안에선 체온과 살덩이만한 위로가 없었기에. 바로 오늘도. 덥수룩하게 자라난 옆머리를 정돈해 주겠다며 바리깡을 들고 왔다가, 헐벗은 채 침대 위를 뒹구는 중이었다. “끝나고 2mm 더 자르는 게 더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그가 손을 뻗어 바짝 깎은 옆통수를 엄지로 쓰다듬는다.
“섹스 중엔 너무 딴 얘기 하는 거 아냐.”
네바는 한창 쑤셔대던 손가락을 더 재게 놀린다. 아, 집중하지 않는 것으로 비칠 수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침착한 듯 돌아오는 대답에 비해 표정만큼은 옆 항성계라도 다녀오는 모습이었다. 가슴까지 발갛게 상기된 몸이 하체를 자극한다. 뒤흔들리는 박자에 맞춰서 입술이 몇 번 자동으로 열렸다가 닫히고, 밝은 눈썹은 찡그릴 듯 말 듯 수없이 꿈틀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상대방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던가. 대부분은 반응을 이렇게 추적 관찰할 일도 없을 텐데. 침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지는 반응까지 지나치게 사람 같은 섬세한 움직임이 오히려 그를 더 난편하게 만들었다.
상체의 근육도 얼굴만큼이나 세밀하게 대응했다. 네바는 아래로 고개를 숙여 안달 난 무릎에 입을 맞췄다. 한창 예민해진 곳에 입술이 닿자 피부 아래 파묻힌 인공 근육이 더 날뛴다.
파악, 마치 그가 아래로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타이밍을 맞춰 얼굴에 액체가 분수처럼 튄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분출된 것이 볼과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흘렀다. 방금 그쪽을 자극한 건 아닌데.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액체는 맛까지 제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불쾌할지 말지 고민되는 골짜기에 풍덩 입수해 버리자 42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눈썹 하나를 미세하게 찌푸렸다가 푼 게 다였지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는 건 이쪽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뭔가 불편하십니까? 어색하지 않도록 네바 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복제해서 만들었는데⋯,”
그럼 지금 내가 뒤집어쓴 건 내 애액이라는 얘긴가. 네바는 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지른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액을 뿜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거든.”
팔자에도 없던 유닛 성교육의 운을 뗀다. 인류가 남긴 유해물들의 연대책임 AS랄까.
“72.7%의 사람들은 만족하셨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다면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통계가 그렇다는데. 옛날 사람들 무섭네. 어쩐지 유닛이랑 섹스하는 데 현실성을 따진 자신이 진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가자는 눈빛이 애절하다. 네바는 다시 양심의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흐윽, 학, 더 빠르게 해 주세요, 미심쩍어하는 그의 심중을 읽었는지 유닛은 조금 전보다 더 날뛰기 시작한다. 바짝 깎은 모양으로 정돈된 손톱이라도 혹여 다칠까 손가락을 최대한 눕혀서 등을 끌어안는다. 팔을 온통 적실 기세로 흘러내리는 가랑이 사이만큼이나 푹 젖은 눈동자가 시선을 모두 훔쳐 갔다. 그 가짜 눈동자에 홀린 듯. 헐떡이는 유닛의 체내에 거듭 손가락을 찔러 넣는다. 과하게 우습거나 경박하지도, 너무 잔잔하고 눌러 참지도 않는 신음이 이어지다 강한 압력이 들어온다.
그를 단단하게 껴안는 유닛의 품 안에서. 네바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42는 확실히 그를 ‘좋아’했다. 가까운 인간에게 감정적으로 얽히고 관심을 가지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고 변명했지만, 낮 주기가 끝나가는 요즘 그의 반응은 집착에 더 가까웠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42, 혹시 어제 네가 내 방 서랍이랑 공구 정리했어?
-네.
-내 방은 내가 없을 때 함부로 들어가지 마. 내가 있을 때는 노크해서 허락을 구하고. 특히 공구는 건드리지 마. 나름의 체계가 있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앞으로 특별 상황을 제외하고 허가 없이 진입하지 않겠습니다.
-꼭 그런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네바가 아프거나, 비상 상황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예외 상황 설정하지 마. 지키지 않을 거면 말해, 잠금장치 달게.
-혹시 제가 신뢰를 떨어뜨린 부분이 있었습니까?
상처받았습니다.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미끄러뜨리는 모습도 제법이었다. 네바는 고개를 저으며 경계를 설정해 나갔다. 귀여운 유닛이라고 마냥 봐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일차적으로 연구소는 고의적 훼방으로 자멸한 게 확실했다. 인위적으로 망가진 환경 유지장치나 비효율적인 배선 등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연구원 중 누군가 미쳐버린 걸까? 스릴러 영화가 아니어도 적은 인원수가 오래 고립되어 있으면 으레 그런 일이 일어났다. 네바 역시 42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나가보면 아무도 없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는 바람 소리가 누군가를 미치게 할 수도 있겠지만. 확률적으로는 42가 범인일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 가장 단순한 것이 정답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협약을 따르는 인공 존재는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다는 점만 제하면 말이다.
42와 온전히 선을 그을 순 없었다. 연구소 안에서 그가 주는 효용이 너무 크다는 것도 있었고, 외부 작업이 가능한 존재가 오직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플랜B를 찾기 전에 그를 등지면 연구소에 영원히 고립될 위험이 컸다.
그것이 표하는 애정을 받되, 그것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안을 찾아야 했다. 연구원 단말기 복구도 그중 하나였다.
“아⋯, 됐다.”
단말기 전원이 켜진다. 그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 패널은 구식인 연구소 환경에선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데이터 분석에 쓸만한 도구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게 연구원용 단말기였다. 수명이 다한 부품이 많아 단말기를 다섯 개쯤 모으고 나서야 온전한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잘 눌리지 않는 물리 버튼을 딸깍이며 단말기 안을 뒤진다.
이젠 먼지가 되었을 연구원의 사적인 기록이 그대로 복구되어 화면에 나타났다. 과거에 머무른 온갖 메모. 뚝 끊긴 스케쥴표. 수많은 보고서. 굵직한 메인 프로젝트 두 개. 복잡한 숫자와 기록을 넘기자 몇 개의 사진과 영상이 뜬다.
-이제 녹화 시작됐습니다. 이건 왜 하신다고 그러셨죠?
잠금 폴더를 가볍게 우회해서 재생한 영상엔 어김없이 42가 등장했다. 무언가를 조작하는 그의 얼굴이 크게 뜬 다음, 뒤이어 침대가 비쳤다. 한쪽 구석에 단말기가 있는 것을 보니 천장에 달린 카메라인 것 같았다. 네바는 카메라가 있을 법한 천장 구석을 본다. 설마 여기도 녹화 중인 건 아니겠지.
-너와 매일 있는 건 아니니까 남겨두고 싶었어.
-제 존재는 영상으로 대체 가능한 겁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다고? 연구원은 장난스럽게 42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추억을 남긴다고 생각해. 사람의 몸은 추억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반응할 수 있거든. 예쁜 말에 비해 그는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로 42를 더듬다가 쇄골 위로 패인 곳에 입을 맞췄다. 얼씨구. 누가 지 딸감용 섹스 테이프 찍는 걸 그렇게 표현해. 네바는 빨리 감기로 몇 번 넘기다가 영상을 끈다.
몇 개의 영상은 죄다 비슷비슷했다. 마지막은 그가 단말기를 든 채 시선에 맞게 42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깔린 42가 렌즈를 올려다봤다. 저건 가끔 꿈에도 등장하는 표정이었다. 단단히 흥분해서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보며 헛기침하고. 재생 바를 건너뛰며 이리저리 찍어봤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도 한다. 그는 머쓱하게 폴더를 나와 괜히 아무 보고서를 연다.
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 유닛이랑 섹스하는 영상이면 어떡하지. 조금만 더 세게⋯, 부탁드립니다⋯, 어젯밤 다리 사이에 끼인 채 애걸하던 42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 전마다 방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되는 섹스도 거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한 주였다. 단말기 정보에 숫자만 남아서 이름도 모르는 어떤 연구원을 잠시 애도한다. 같은 여자와 뒹구는 회상 다음에 하기 적절한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초장부터 이렇게 강력한 사생활이 나올 줄은. 네바는 목 주변의 흉터를 긁는다. 연구 폴더에도 다른 영상들이 많았다. 비슷비슷한 미리보기 창을 보니 실험 노트로 추정된다. 나오라는 미스터리는 안 나오고. 섹스 아니면 숫자라. 갑자기 긴 연구 과정을 뒤적거릴 의욕이 줄어든다. 물이나 마시고 올까. 그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가 투명창 앞에 서 있던 42와 마주친다.
“7분 51초 전부터요.”
문이 열리자마자 42가 대답했다.
“뭐?”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으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맞.., 맞아. 왜 그러고 있어. 놀랐잖아.” 네바가 나오자 뒤에서 자동문이 스르륵 닫힌다. 머뭇거리다가 중앙 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42가 보폭을 맞추며 옆을 따른다. 온도 조절 시스템을 재배치한 덕분에 복도의 공기는 이제 아늑했다.
“노크하려다가, 네바가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했습니다.”
반응? 네. 기록 영상을 보고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했거든요. 보면서 39번 눈을 깜빡이고 6번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손은 자꾸 관절 접합부위를 만지작거렸고. 중간중간 헛기침하다가 마지막엔 흉터를 긁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보면 부끄러우십니까? 네바는 다시 습관처럼 흉터를 긁으려다가 그를 의식해 손을 내린다.
“당연하지. 저건 프라이버시잖아. 함부로 보면 안 되는 사적인 영상이야.”
“아. 마침 오늘은 그 영역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었는데. 가면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프라이버시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쯤인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 구체적으로 더 설명해 볼래? 네바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푼다. 고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넘겼다. 한동안 감정이나 영화 해석 같은 쉬운 질문들만 들고 왔는데. 최근 들어 늘어난 경계에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제가 신경 써주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면 불편해하세요. 그 선을 알고 싶었습니다.”
“흠.” 첫 번째 통로에 서자 42가 알아서 제어반을 조작한다.
“얼마 전에 저와 섹스하고 나서.” 윽. 네바는 문을 여는 그를 가볍게 흘긴다. “제가 담요 덮어주니까 좋아하셨죠.”
“그랬지.”
“왜 그랬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얕은 잠에 들고 나서 거의 3분마다 몸을 뒤척이셨습니다. 그건 평소 수면 패턴보다 3배 높은 빈도고. 어깨를 움츠리는 각도도 평소보다 15도 더 컸습니다. 그래서 추워한다고 판단하여 담요를 가져와 덮어드렸습니다.”
기압이 맞춰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고요한 복도에 유닛과 사람이 들어선다.
“잠깐. 내가 자는 걸 평소에도 관찰한다고?”
“네.”
“어떻게?”
“방마다 녹화 기능이 있습니다.” 저장되는 건 아니고.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제가 가끔 열람해서 볼 때만 제외하고요. 얼굴을 찡그리는 네바를 보며 그가 설명을 덧붙인다. 역시 그랬군.
“… 그런걸 왜 봐?”
“수면 패턴을 학습하고 추적해야 아침에 깨워드릴 수 있습니다.”
“난 깨워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러면 마냥 내버려둬야 합니까? 이곳은 낮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유지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지는 곳입니다. 지구 생활인 평균치의 신체 리듬을 유지해 드리기 위해선 수면 패턴 학습이 필수적입니다.”
으음. 좁혀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모른다. 새삼스럽게. 원래 모든 보안의 첫 시작은 기록이었다. 연구소 내부를 들쑤시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방심하고 있었던 걸까.
“지금처럼 말입니다. 제가 필요에 의해 관찰하는 걸 알면 다들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42.” 네바는 한숨을 쉬며 통로에 진입한다.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지켜본다는 걸 알면 불편해해. 그건 당연한 거야.”
“왜입니까? 필요성은 인정하시잖아요.”
“통제당하는 것 같아서 그래.”
“전 네바를 통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화면 너머에서 보는 게 다입니다. 실제로 그걸 말씀드리기 전까진 괜찮으셨습니다.”
“알아. 근데 그렇게 느껴진다고. 의식하게 돼.”
고개를 숙여 통로에서 빠져나온다. 문이 닫히고. 둘은 다시 어스름한 복도를 걷는다.
“상대방을 파악하고 배려하기 위해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시는 거죠? 네바도 절 보고 무언가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서로를 관찰하면서도 관찰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 겁니까?”
“그건⋯, 균형의 문제라고 하자. 양쪽이 비슷한 정도로 알아야지. 한쪽만 일방적으로 많이 알면 안 되는 거거든.”
“제가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입니까?”
걸어가던 42가 옆을 돌아본다. 의아함에 찬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봐 주었다. 언제부터 이 표정에 익숙해진 걸까. “응.”
“얼마나 알아야 ‘너무 많이’ 입니까? 생활 리듬 학습하는 건? 혼자 있을 때 어떤 모습인지 아는 건? 섹스할 때 어딜 자극해야 좋아하는지 분석하는 건? 제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네바에게 유사한 정보를 제공하면 괜찮아질까요?”
상대가 저에게 관심이 적어서 정보 비대칭이 생기면요? 제 측에서 보정하면 해결됩니까?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묵묵히 걸어가며 그가 쏟아내는 질문을 들어주었다.
“… 아니면 패턴을 통해 예측 가능해지는 것 자체가 싫은 겁니까? 인간이 원하는 자유란 예측 불가능성에서 오는 걸까요?” 42는 한참 말을 잇다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질문으로 마무리 짓는다.
“모르겠어.” 네바는 조금 질린 투로 대꾸한다.
둘이 중앙 홀 앞에 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42는 요청하기도 전에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따른다. 차갑지 않고 온수가 섞여 미지근한. 정확히 그가 좋아하는 온도로.
“이번에도 ‘알아서’ 인가요? 인간 자신도 모르는 선을 알아내서 ‘적당히’ 행동하라고?”
“일단 내가 혼자 있을 때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건 하지 마. 균형을 맞춘다고 생각해. 그런 게 프라이버시야.”
그가 더 징그러워지기 전에 제동을 건다. 따라준 물컵을 받아 마시면서.
“그땐 저와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궁금했을 뿐입니다. 자세도. 말투도. 행동도. 습관도. 타인의 시선이 없을 땐 제가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이셨거든요.”
“그래, 바로 그런 걸 보지 말라고.”
네바는 컵을 내려놓고 푹신한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낡은 패브릭 소파 안에 푹 잠긴다. 42는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볶은 견과류를 작은 접시에 담아주었다. 피스타치오. 마카다미아. 이젠 생산지가 크게 줄어 구하기 힘들어진 피칸까지. 그가 깨작거리는 눅눅한 아몬드는 빼고. 그건 보관 상태가 나빠 산패된 기름 맛이 심했다.
“적당히 알되 너무 알지는 말고. 신경은 써 주되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하지 말고. 관심은 주되 관찰은 하지 말고…, 불가능으로 보이지만 시늉은 해 보겠습니다.”
42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원래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거야. 굳이 그걸 왜 하려고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됩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물어볼 거잖아.”
네바는 견과류를 씹으며 찌뿌둥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목을 돌릴 때마다 뚝 뚝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건 상대를 덜 알려고 노력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아는 걸 들키지 말고 잘 숨기라는 뜻입니까?”
컵을 정리한 42가 소파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바로 나갈 것처럼 팔걸이 부분에만 살짝 기대서.
“상대를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야. 거리를 좀 둬.”
“그러면 상대를 완전히 알면 안 되는 겁니까? 관심이 생기면 전부 이해하고 뜯어보고 싶잖아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남아있어야 관계가 유지되는 걸까요? 그의 표정은 질문이 반복될수록 더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하자. 너무 자세히 알면 정이 떨어질 수 있거든. 네바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준다. 인류를 대표하는 건 힘든 일이군.
“그러면 진짜 마지막.” 42는 중앙 홀을 그가 원하는 온도와 조도에 맞춘다. “프라이버시의 경계에 관한 질문에 명확한 해답은 없었는데도 오늘 외부 작업에 나가야 합니까?”
“이 정도로 물음표 살인마 짓을 했으면 다녀와라.” 네바는 발을 뻗어 그의 다리를 툭툭 찌른다. 노드 설치한다고 며칠 늦어졌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
하하. 장난입니다. 곧 나갈 준비를 마칠 예정이었어요. 기댔던 그가 일어나자 소파에서 소리가 났다. 허리를 굽혀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다녀오겠습니다. 곱슬한 머리 위로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42가 외부 작업에 나간 시간이 기회였다.
네바는 그를 보내자마자 거주 구역의 텅 빈 탕비실로 들어간다. 안쪽에 봐둔 환풍구 입구를 뜯고, 환풍구 통로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가늠한다. 배선 수리를 하며 패널 안쪽을 눈여겨본 대로, 환풍구는 복도를 따라 시설되어 있었다. 42가 전송해 준 설계 도면에는 군데군데 끊겨있는 곳까지 온전하게.
몇 번은 올라가고, 몇 번은 내려가고. 환경 유지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완전히 접근이 불가한 곳을 제외하면 갈 수 있는 영역이 넓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네바는 환풍구 탐색을 마치고 돌아온다. 42는 20분간 외부에서 작업하고, 10분은 급속 충전 및 히팅으로 부품 손상을 회복하는 데 사용했다. 건물 출입구에서 메인 거주 구역까지 내려오려면 또 6분. 36분이 거의 다 흘러가는 중이었다. 단말기 화면의 시계가 깜빡거린다.
밖에 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숙소에 돌아온다. 굴러다니는 공책을 펴 기억나는 대로 환풍구 지도를 스케치했다. 연구소 곳곳에 카메라가 있다고 했던가. 그가 제발 외부 작업 시간에는 내부 서버에 접속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해 주길 바라면서. 저장 공간에 기록한 대로 선을 그어나간다. 촬영 각도를 의식하며 소심하게 선을 긋던 손놀림은 시간이 지날 수록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전송받은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비교해 본다. 마침 지난번에 복구한 창고 밑 공간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2에게 용도를 물었지만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던 실험실. 보안 출입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한 번도 접근할 수 없었던 공간. 그곳으로 갈 차례였다.
넓은 연구소 내부를 돌아다니자니 환풍구 지도 작성에만 하루가 꼬박 쓰였다. 그가 다음 외부 작업을 나갔을 때. 네바는 작전을 실행해보기로 마음먹는다.
내일이면 크리오는 별을 등지기 시작한다. 완연한 밤 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외부 탐사가 불가능해지니 그의 눈을 피할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네바는 자는 척하다가 그가 새벽 작업을 나간 틈을 타 숙소를 빠져나왔다.
내부에 저장한 지도를 따라 실험실에 접근한다. 거주 구역이 아니라 내부가 싸늘했다. 생활이 가능한 구역 전체의 온도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42에게, 차라리 핵심 지역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고 나머지를 춥게 두자고 제안한 결과였다. 외투를 챙겨 입을 수 없는 상황이라 덜덜 떨며 천장에서 뛰어내린다. 먼지가 엄청나게 쌓인 모포가 있어 급히 둘렀다.
어둠 속에서 제어반 전원을 작동시킨다. 웅웅거리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메⋯ 티스. 제어반 벽에 붙은 공용어 로고를 낮게 소리 내 읽는다. 시스템은 부팅되는 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연구원 단말기를 연결해 정보만 간단히 훔칠 생각이었는데, 내부 프로그램 용량이 너무 컸다. 이 정도면 함선 운용 시스템이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최대한 잘게 쪼개 기록 로그 일부라도 전송받으려고 애써본다. 지난번에 본 기록물 저장소의 백업 본도 함께 있어 전송을 여러 개 걸어놓고 모포를 다시 고쳐 둘렀다. 42가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전송받고 이만 돌아가야 했다.
전원 버튼 불빛만 반짝이는 어둠 속이라 그런지 또 누군가 속삭이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아직 외부 작업 시간 많이 남았는데. 꼭 42와 비슷한 목소리처럼 들려 긴장으로 침을 삼킨다. 엣취, 모포 먼지로 몇 번 재채기를 더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가만히 있으면 얼어서 죽을 것 같기도 했고, 들어온 김에 최대한 탐색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기도 했다.
제어반을 제외하면 그다지 볼 게 많은 방은 아니었다. 서버실이 유독 크다는 점이 있었지만. 저 정도 규모의 프로그램을 굴리기 위해선 적절한 크기였다. 과학 결과 분석이라도 돌리는 걸까. 과학 연구용 AI는 다른 AI보다 고성능이라는 얘기를 주워들은 것도 같았다.
네바는 서버실 안쪽을 뒤지다가 외부 통신장치를 발견한다. 은하 바깥으로 패킷을 전송할 수 있는 대형 통신장치였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살폈지만 이 역시 고장 난 상태였다.
모든 계획이 실패하면 소송을 각오하고 SOS를 칠 순 있어야 하는데. 코앞에 함선을 두고 늙어 죽는 건 아니겠지. 허탈함에 장치를 이리저리 뜯어본다. 심우주를 향해 전자기파를 직접 쏘아보내는 구식 장치였다. 연구소 설립연도를 감안하면 최신식이긴 했지만. 지금의 자신이 고치기엔 너무 오래된 방식이다.
더듬더듬 원리를 생각하며 내부를 살폈다. 무언가 있어야 할 곳이 빈 것을 보니 일부 부품이 제거된 느낌이었다. 설계의 흐름이 뚝 끊긴다. 이것도 누구 작품이네. 네바는 뒤통수를 긁는다.
시간이 다 되어 탐색을 중단하고 돌아온다. 핵심 시스템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부팅 중이었다. 진행 바를 보니 거의 다 켜진 상태였지만,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조작이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로그 일부만 받은 그는 다시 제어반을 강제 종료한다.
모포도 제자리에 돌려두고. 천장 위로 가볍게 점프해 매달린다. 연구소에 들어와서는 운동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뚜껑 나사를 다시 조인 다음 다시 환풍구 위를 기어 돌아간다.
쿠당탕, 환풍구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아래를 지키고 있던 42와 부딪혀 넘어진다. 표면은 말랑해도 엄연히 특수 합금으로 된 유닛이었다. 아 씨, 홧홧한 코를 문지르자 42가 손을 내밀었다.
“… 메티스 실험실에 다녀오셨네요.”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실험실 공기만큼이나 냉랭하다. 차가운 말투에 불안함을 감지한 네바는 손을 잡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난다.
“전송받은 데이터 단말기 주시겠습니까? 위험하니 폐기하겠습니다.”
“손대지 마.” 내미는 손을 쳐낸다. 오. 그가 물끄러미 이쪽을 본다.
어쩔 셈이지? 둘은 한동안 말없이 대치한다.
이렇게 대놓고 확인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풀리니 이판사판이었다. 의체가 달린 다리에 힘을 실어서 그를 발로 찬다. 중심을 노리는 허벅지가 반동을 더해 솟구친다. 그가 협약을 따르는 유닛이라면 맞아 주거나 피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막을 것이다.
“?!”
다리보다 더 빠르게 골반 께에 주먹이 들어온다. 허벅지 움직임을 읽고 먼저 42가 공격해 왔다. 썅, 다리에 닿은 것 없이 그대로 몇 바퀴 날아가 바닥을 구른다. 단단하게 내려쳐진 부분의 충격이 컸다.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화된 신경망이 타격점 주변에 모이며 통증을 삭였다.
“… 공격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