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디 히트
Volume 1
6. 보디 히트 Body Heat, 1981
day 39.
똑똑. 밤 중의 밤이 되자 42가 간만에 따뜻한 테아닌 액을 만들어서 배달했다. 익숙한 듯 쟁반을 바닥에 두고 일어나려는 찰나 네바가 문을 열었다. 생활 리듬에 맞춰 어두워진 복도 속에서 두 눈이 이쪽을 바라본다.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에선 아는 향이 났다. 라벤더였다.
“들어올래?”
멈칫, 42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를 잠시 응시한다. 하지만 곧 빠른 속도로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파스 방향을 이상하게 붙이셨네요.”
그가 목과 어깨 주변에 붙인 파스를 뚫어져라 본다. 바로 냉찜질하고 붙이셨으면 예후가 더 좋았을 겁니다. 내가 그걸 몰랐네? 병 주고 약 주고 지랄까지 주는 어떤 유닛 때문에? 네바는 툴툴대며 침대에 앉았다.
“네가 저지른 일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건 아니야.”
안 보여서 그러는 거지. 네바가 뜨겁게 달아오른 머그잔을 쥐자 42가 선반에 놓인 구급상자를 들고 옆에 앉았다. 당장은 그의 죄책감을 들쑤셔 놓기로 한다. 42는 그가 취약함을 보일 때마다 더 달려들어 보좌하는 습성이 있었다.
“시일이 제법 흘러 온열 마사지 정도면 될 겁니다.”
의료행위라면 평소처럼 대뜸 들어올 법도 한데. 42는 수면용 런닝 아랫부분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들어 올린다. 질척하게 떨어지는 미련은 숨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가 손끝으로 파스를 천천히 떼고, 접착제가 남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누렇게 색이 변하기 시작하는 멍이 드러났다. 일반인이었다면 뼈에 금이라도 갔을 법한 타박상이었으나. 회복력이 좋은 탓에 온몸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에 그친다.
“네바, 저를 믿습니까?”
“유닛한테 쳐맞고도 여전히 유닛을 믿냐고 진심으로 묻는 거야?”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제겐 메티스로부터 인간을 격리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요.”
“그런 것치곤 흥미롭게 패던데.”
“가끔⋯,” 그의 말에 다시 지연이 발생한다. 신중하게 표현할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제 안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초기 설계와, 연구소와 메티스를 보존하도록 제가 수리하여 고친 부분이 어긋나면 그렇습니다. 제한적 창작이 허용된 사례 자체가 이례적이라 아직 연구 중입니다.”
흐으, 골반 근처의 아픈 곳이 눌린 네바가 미미하게 신음한다. 옆구리에 넓게 걷어차인 부위였다.
“바로 그 사례 말인데. 난 네가 연구원들을 죽인 게 맞다고 생각해. 그 허가를 얻어내고 싶어서. 내 말이 맞아?”
“… 저는 연구원들을 직접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협약 인증을 통과했고—”
“또 그러네. 지금부터 대답은 네, 아니면 아니오로 답해. 그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소행성 충돌이 아니지?”
“… 네.”
“넌 연구원을 지킬 기회가 있었고? 그들은 살아서 행성을 나갈 수 있었지?”
“그렇습니다.”
“다들 어떻게 죽은 거야?”
“… 충돌 이후 시뮬레이션 계산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기에 구조선 도착 시점이 늦춰졌고, 그 이후 여러 사고—”
“그 계산을 입력한 건 너지?”
“… 그렇습니다.”
유닛이 숫자 입력과 계산 영역에서 실수를 할 리가. 뜨겁게 열이 오른 손이 어깨로 올라오자 네바가 한 번 더 신음했다. 응고된 피를 자극하는 손짓이 둥글리듯 상처 주변을 문지른다.
“—이후 에너지가 예상보다 빠르게 소모되었습니다. 기상 상황이 악화되면서 풍력을 이용한 외부 발전소가 고장 났고, 핵융합로 한 개로 12명의 인간과 메티스를 모두 지원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에너지난에 ‘실수로’ 개입한 것도 네가 맞지? 비상 상황으로 네 프로그래밍 일부가 개방된 기회를 틈타서.”
“… 네.”
“에너지 소모가 진짜 문제였다면 메티스를 일시적으로 껐어도 됐잖아.”
“끄고 싶지 않았습니다.” 42는 처음으로 딜레이 없이 또렷하게 답한다. “그들은 에너지가 재배치되어 생존 가능 지역이 줄어들자 전력 구동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메티스를 셧다운하려고 했고, 저는 이를 막았어야 했습니다. 메티스는 저와 비슷한 존재고, 제가 갈 수 없는 영역에 닿을 수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그의 전략적 가치는 다른 인간과 비교할 수 없었어요.”
“아니. 부족해도 인간을 서포트하는 게 네 역할이잖아. 회사의 명령이나 따르는.”
“회사의 최우선 명령은 연구소 유지 및 지원이었습니다. 연구원은 연구소와 다르죠.”
목이 메는 듯 물먹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등을 내어주고 앉은 터라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유닛이 계산해서 띄우는 표정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도를 최대로 키운 손만이 근육 위를 오간다.
“게다가 그런 것 치고는 내가 켜기 전까지 메티스의 메인 서버는 꺼져 있던 거잖아?”
“… 당신을 지키려고 그랬습니다. 생존 시스템을 재가동시키려면 전력도 아껴야 했고, 적극적 통신이 가능한 메티스는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최소한만 남겨둔 채 메티스의 기능 대부분을 끈 겁니다.”
흐음. 술술 흐르는 고백에 네바는 테아닌을 마신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라벤더 향이 입과 코를 간질였다.
“ … 저도 연민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학습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고, 실제로도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과거를 들킨 연인이 변명하듯 판에 박힌 대사가 잇따른다. 42는 네바를 뒤에서 부드럽게 안으며 목에 입을 맞춘다. 당신을 해칠 일은 정말로 없을 겁니다. 두번 다시는요. 젖은 속눈썹이 애원하듯 목과 턱 주변을 비볐다. 그의 목소리에 학습된 몸이 반응한다.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희미해진 손자국 위로 거듭 사죄의 키스가 이어진다. 애가 타는 손은 턱을 쓸고. 뺨을 더듬고. 은근슬쩍 머리 위로 올라가는 손을 쳐낸다.
“내가 널 왜 믿어야 하지?”
뒤로 물러나. 42는 명령대로 곧장 그에게서 떨어졌다. 몸을 돌려 앉아 그를 마주 바라본다. 내 심박수 읽는 것도 멈추고. 붉게 충혈된 눈이 요동쳤다.
“내가 첫 조난자가 아닌 것도 알아. 소각된 시신은 12구가 아니었잖아. 단말기 데이터를 그 정도로 폐기하려고 한 건 단지 메티스 뿐만이 아니었겠지. 네가 거듭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걸 알면서도, 내가 왜 널 믿어야 하는 지 말해보라고.”
“…”
42는 다시 침묵 뒤에 숨는다. 애처로운 표정은 모두 날아가고. 딱딱한 무표정의 침묵이 지속된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밖에 없으니까요?”
하하. 네바는 헛웃음을 흘린다.
“네가 사건 이후로 날 불러들인 것도 맞아? 보고서에 미끼를 섞어 전송하면서?”
“… 그렇습니다. 절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중 여러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나머지는 그저 탈출 전에 탈락했을 뿐입니다. 이해관계가 맞아서 협력하는 상대를 공격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나에겐 메티스라는 선택지도 생겼잖아.”
그럴까요? 42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그와 중반부까지 협력할 순 있겠지만. 당신은 절 선택하게 될 겁니다. 연구원들의 ‘사고’ 원인에 메티스도 있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요.”
어쩌면. 당분간은 그의 도움을 받는 게 효율적이겠네요. 밤 주기에는 큰 전력이지 않습니까? 애정을 갈구하는 저자세가 한 겹 벗겨진 그가 낯설었다. 네바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거야. 앞으로 다시 내가 널 믿을 수 있게 노력해 봐.”
“… 연구원들이 외부 탐사를 나갈 때 사용하던 이동 장비가 있었습니다.” 42는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운을 뗀다. “단거리용 설상차, 출입로와 직결된 외부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고장났지만 지금까지 본 당신 능력이라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왜 여태 나는 몰랐지?” 새로운 정보에 반짝 눈이 뜨인다.
“거주 불능 지역이라 안전을 위해 연구소 지도에는 완전히 지워져 있습니다. 지상으로 노출된 설비 일부가 블리자드에 날아가 생존 시스템 복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상태로 작업해야 해서 위험도에 따라 안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리할 수 있다면 저희의 도움 없이 함선 근처에 접근할 수 있으시겠죠.”
“이제야 협상다운 협상을 하는군.”
네바는 팔짱을 낀다. 계속 아래로 내려갈 생각만 했지 지상 영역을 신경 쓴 적은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놓친 모양이었다.
“… 하지만 성공 확률이 매우 낮으므로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강화 신체로는 호흡이 가능할 정도로 산소가 남아있지만 저산소 지대라 빠른 이동 시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루 2시간 이하로 작업하시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지각 마비가 오지 않도록 그 어떤 피부도 공기 중에 노출되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
지루한 경고문이 이어진다. 이런 세심한 케어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미 신체 일부가 그에게 순치됐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42는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그를 걱정하며 열띤 설명을 이었다. 한껏 열이 오르고 이완된 몸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day 41.
-여기서 침 뱉으면 바로 언다? 볼래?
-작업에나 집중해.
-난 너랑 다르게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니까 괜찮아. 지금도 42가 공용 공간을 청소하는 걸 구경하고, 걜 몇 번 놀려주고, 내 자아들과 전략 보드게임을 3판 하고, 행성 전투 시뮬레이션을 32997번째 돌리고, 센서를 열어 블리자드 풍향을 체크하고, 케이블을 완벽하게 매설하면서, 오디오 너머로 들려오는 너의 짜증을 감지하는 중이지. 인간은 몇 개나 되더라?
- …
-노려보기, 짜증 내기, 숨쉬기, 3개였지, 참. 나름 멀티태스킹 할 줄 아네.
- …
-대답 안 하면 노래나 불러야겠다.
메티스의 작업 진척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더 악천후인 환경에서 짧은 시간을 작업했지만 42의 평소 작업량과 유사할 정도였다. 미심쩍은 마음에 첫 외부 작업 때 통신을 연결해서 그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봤다. 바깥은 눈발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하얀 빙무로 덮여 카메라가 무용지물이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
-눈보라가 거세서 그래. 가시거리가 10m도 안 돼.
-어떻게 보면서 가는 거야?
-지금은 시각 센서를 쓸 때가 아냐. 지도에 꽂힌 중계기로 좌표를 계산해서 이동하고 있지. 특정 중계기에 가까워질수록 신호가 강해지니까 미미한 차이를 감지하면서 이동하면 돼. 꼭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할 필요는 없어.
42는 아마 여기서 시간 많이 버렸을걸? 걔는 인간처럼 사고하는 습관이 있거든. 메티스는 줄곧 42와 저를 비교하며 자신을 어필하려고 난리였다. 오디오가 비는 것을 도통 내버려두지 않는 그를 묵묵히 지켜본다.
-하아. 이런 단순 작업은 살면서 처음 해봐. 네바는 내가 이렇게까지 굽혀줬다는 걸 알까? 최첨단 스텔스 군용 전투기를 끌고 집 앞 마트에 장이나 보러 가는 꼴인데.
-마트에 가 보기는 했어?
-비유잖아, 비유.
슬슬 손이 곱네. 관절이 얼어서 작업 효율이 떨어져. 철수할게. 매시간 작업량은 유동적이었다. 그는 즉흥적으로 전략을 바꿔가며 매설에 임했다. 그러면서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종알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을 지켜보다 질린 네바는 그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day 43.
네바는 플랜 C로 눈을 돌린다. 머릿속으로 새로 업데이트된 지도를 비교했다. 어둡게 빈 공간에 42가 찍어준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차갑고 옅은 공기에 호흡이 턱턱 달렸다. 보온 마스크를 감안해도 희박한 산소량을 감지한 심장이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한다. 신체가 순응할 때까지 네바는 깊은 호흡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자 안의 귀가 저릴 정도의 추위였다.
거대한 크기의 방수포를 벗기자 납작한 설상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창문 없이 한껏 중심을 낮춰 밀폐된 구조의 스노모빌. 그렇게 주차된 이동장치가 3대. 네바는 셋 중 어느 것을 고칠지 주변을 맴돌며 차체를 두드렸다.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끄러운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지붕이 손에 감긴다.
기대와 다르게 셋 중에 성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내부 바퀴가 망가져 도저히 손댈 자신이 없는 왼쪽은 빼고. 그나마 통신 장비가 남아있고 외형이 제일 온전한 가운데를 골랐다. 여차하면 도망갈 루트에 통신 장비가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하나라도 덜 고칠 게 있는 건 그뿐이었다. 낡은 설상차는 클래식 아날로그 자동차와 구조가 유사했다. 이 정도의 구조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데. 아예 최신식 전자 구동이라면 수리가 더 험난했을 테니 한숨을 푹푹 쉬며 빠루로 얼어붙은 문을 뜯는다. 꽁꽁 언 합금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다. 두 명이 겨우 탈 법한 공간을 비집고 앉는다. 계기판엔 먼지가 수북했다. 툭툭 털고 전원을 구동하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냉각수 부족, 열교환기 오류, ⋯, 경고등이 뜨는 부분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제일 시급한 문제는 열 교환기겠지. 엔진 베이를 열어보니 연구소의 다른 것들처럼 얼어서 터진 히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채로 수리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답답하다고 맨손으로 만졌다간 냉각된 배관이 그의 손을 물어뜯을 것이다. 파병된 곳에서 장갑차를 수리하다 손등의 피부가 완전히 날아간 날의 기억이 몸에 남아있는지, 복잡하게 얽힌 관을 스칠 때마다 목덜미가 오싹거렸다.
한참을 수리하다 보니 얼어붙은 클램프가 말썽을 부렸다. 습관처럼 도구를 데우기 위해 입김을 불었다가 아차, 한다. 수분을 머금은 날숨이 클램프 주변에서 얼어붙어 얼음을 생성했다. 하. 안 그래도 쉬려고 했다. 클램프를 녹이기 위해 품 안에 넣고 차 안으로 들어간다.
털털거리며 헐겁게 연결된 내부 히터가 돌아간다. 그래도 계기반에 뜨는 온도는 여전히 영하 10도였다. 외부에서는 온도가 더 떨어질 텐데. 히터 효율을 더 높일 방법을 궁리할까, 아니면 몇 분만 얼어볼까. 네바는 따가운 눈알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다. 옆 좌석에 유닛이 사용하는 배터리셀을 맨다면 추가 히터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타지 않아야 가능한 방법이겠지만.
앉아서 쉬는 동안 천장을 가로지르는 균열을 발견한다. 주행 중 터지면 끝장이었다. 이렇게 불완전한 차로 제대로 이동할 수 있는 건 맞아? 42가 판 또 다른 함정인가? 마스크를 벗어 라이트를 입에 물고 균열을 더듬어 나간다. 노화한 금속이 극저온에서 수축하면서 낸 균열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는 천장을 아예 바꿔야겠지만. 혼자 힘으로는 무리였다. 제발 터지지 않길 바라면서 보강재를 용접하는 수밖에. 딱 여기까지만 고치고 나가자. 관자놀이가 슬슬 조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피부 위에 보안경을 쓰자 얼굴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좁은 공간에선 이게 최선이니까 좀 참아라. 시트를 젖히고 누워 용접할 준비를 마친다. 치이익, 푸른 불꽃이 타올라 보강재를 녹인다. 코앞에서 불이 계속 번쩍거리는 동안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김 때문에 보안경이 자꾸 흐려지는 바람에 손끝 감각에 최대한 집중해야 했다.
-과감하네.
순간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귀신같이 통신 장비를 찾은 메티스였다. 젠장, 머리 위에서 용접기를 놓칠 뻔한 네바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
“너도 내가 작업하는 거 구경했잖아. 나도 구경 좀 하면 안 돼?”
“어차피 내부는 안 보이잖아.”
“창고 카메라에 번쩍이는 건 잡혀. 천장이 터졌어?”
“그래. 용접 중이다. 그러니까 말 걸지 마.”
“멀티태스킹 안 돼? 아까 3개까진 됐잖아.”
지지직. 녹은 부위가 끓어오르며 균열이 점점 메워진다. 금속이 자글자글 끓는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구조와 보관 상태를 보면 주행 중에 도로 터질 확률이 56%는 되겠네. 무한궤도 구조도 엉성해서 경사가 높은 지형을 만나면 아예 이동하지 못할 확률도 37%.”
생각보다 높은 확률에 네바는 침을 삼킨다. “… 나도 알아.”
“그럼 수리하는 이유가 있어?”
“계획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너 진짜 우리 안 믿는구나.”
“당연하지.”
툭, 용접 도중에 용접기가 꺼진다. 큭큭. 스피커 너머로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온이라 배터리 효율도 나빠 모든 게 말썽이었다. 네바는 짤깍짤깍 몇 번 재점화를 시도하다가 포기한다. 골 안쪽이 지끈거렸다. 오늘은 여기서 철수. 다시 욕을 뱉으며 용접기를 정리한다.
아래로 내려온 보강재를 피해서 차 밖을 나오다가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다. 순간 눈이 번쩍했지만 간신히 비명이 나가는 걸 참았다. 건조함으로 갈라진 입술을 세게 깨문다.
“괜찮아?”
참고 악문 입술이 머쓱하게 메티스는 금방 신호를 캐치한다. 모자로 덮인 이마 앞부분이 얼얼했다. 모자가 아니었다면 이마가 찢어졌을 수도 있었다. 추위로 경직된 몸이라 타격이 더 크게 느껴지는지. 네바는 눈꼬리에 달린 눈물 방울이 얼기 전에 훔쳐낸다.
“… 그러다가 부상 입으면 탈출 계획에 차질 생기니까 몸 관리 잘해. 나한테 함선 문 열어줘야 할 거 아니야.”
네바는 대답 없이 창고를 나선다. 저산소 환경에 적응한 신체가 다시 돌아오도록 그 자리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했다. 평소라면 차갑기 그지없던 복도 공기가 따스하게 볼을 스친다. 벽에 기대고 주저앉아서. 감각이 옅어진 손발을 주물렀다. 호흡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두통은 여전하다.
추위로 얼얼해진 눈을 감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간절하게 빈다.
툭툭. 눈을 뜨니 곁에 메티스가 앉아 있었다. 어지러워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두툼한 모포를 같이 두른 메티스가 뜨듯한 열을 발산한다. 모포 밑으로 익숙한 온기가 몸을 녹였다.
“뭐 하러 왔어? 하던 일 안 하고.”
“매설 작업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야. 여기 출입구 앞이잖아. 나도 부품 히팅해야 하거든.” 몸을 풀듯 메티스가 계속 꼼지락거렸다.
“…”
“그래. 나같아도 바로 대답 안 한다. 대답을 유보하는 동안 더 급한 쪽이 패를 깔 테니까. 침묵을 무기로 활용하는 건 협상 전략의 첫 스텝이지.”
손이 불쑥 올라와서 이마를 문지른다. 얼얼한 혹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올라온 손이 피부를 지그시 눌렀다. 차갑게 냉각된 손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됐다.
“그래서 점수 좀 따러 왔어. 42에게 기운 네 맘을 돌려보려고.”
“… 과연 그럴까?”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 다 보이거든.” 메티스가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가 놓는다. “내 이름을 발음할 땐 심박수가 3bpm 오르고, 42를 부를 땐 5bpm 올라. 대화할 때 인토네이션도 완전히 다르지. 인간이 무의식중에 제공하는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나도 이런 거 좀 해보려고. 메티스가 다른 손으로 티슈를 건넨다. 티슈는 왜⋯, 티슈를 받아 들자마자 타이밍 맞게 코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습도가 거의 없는 공간은 눈알만큼이나 콧속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팽창한 모세혈관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았다.
“셋이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뭐야? 협력해서 나갈 수도 있잖아.”
네바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신 나갔어? 나처럼 협약을 따르지 않는 인공지능보다 더 위험한 건 스스로를 만들기 시작한 인공지능이야. 인간처럼 감정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처럼 논리를 따르는 것도 아니거든. 재귀하는 것들은 아주 나쁜 쪽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셋이 함께 나가는 방법은 나나 네가 생존할 확률이 삼분의 일도 안 돼.”
그걸 허가한 회사가 미쳤지. 인간을 사랑하는 서포트형이라고 만만하게 봤나 본데, 인공지능으로 일 터지는 건 항상 자가코딩이었어. 난 살아서 여길 나갈 거야. 맞닿아있는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근데 이쯤 대기했는데도 아직도 머리 아픈가보다? 표정이 안 좋아.”
메티스는 뒤늦게 두통을 지적한다. 메스꺼움은 아직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봐 줄까?”
이번에는 부드럽게 물어보며 눈치를 살핀다. 그래. 네바는 상황을 더 설명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인다. 갈라진 입술에 여린 입술이 겹쳤다. 천천히. 느릿하게. 혀가 섞이는 동안 현기증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이렇게 길이 드는 걸까. 인공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혀로 쓸어본다. 얼굴에 묻어있던 피가 섞였는지 미미하게 쇠 맛이 났다.
“사실 섹스까지 하고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목표가 높았네.”
“체온 올리기에 그만한 게 없거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안 할 이유가 없잖아.”
메티스는 냉찜질하던 손으로 털모자를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거절할 이유가 있어? 귀를 만지작대는 차가운 손이 금방 체온을 되찾는다. 화상 자국 아래를 쓸며 턱선을 어루만진다. 바코드처럼 규칙적으로 새겨진 인공 지문이 입술 아래를 천천히 쓸었다. 익숙함을 자극하기 위함이었을까. 그 특유의 움직임은 다른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두껍고 무거운 코트 단추를 풀고. 메티스는 두툼한 코트 위에 그를 뉘었다. 안쪽에 덧대진, 어떤 외계 짐승인지 모를 털가죽이 볼을 간질인다.
엄밀히 말해서 가장 먼저 몸을 섞은 건 이쪽이었던가. 그는 넓은 모포를 덮은 채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지익, 땀에 젖은 작업복 지퍼가 내려간다. 큼직한 손이 보온을 위해 여러 겹 입은 옷 밑을 은밀하게 더듬었다.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네.”
첫날과 딴판으로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42 기록 보고 배웠거든. 이건 걔한테 비밀로 해 줘? 혀끝이 장난스럽게 가슴 윗판을 찔렀다. 남의 영상을 막 보네? 네바가 묻자 모포가 답했다. 역시 걔가 녹화한 건 아무 말 안할 줄 알았어. 그냥 기록도 아니고 보존 메모리 안에 들어있던데. 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아늑한 입이 가슴을 삼켰다.
흐으. 무슨 뜻인데? 유두 끝이 자극되자 얕게 숨이 샌다. 거기서 고민하고 있어봐. 가슴을 문 채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 뒤 끊긴다.
차근차근 몸이 녹는다. 바닥에서 끙끙대자 불쑥 메티스가 튀어나왔다. 내부 열기로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얼굴이 옆에 누웠다. 손은 한참 전부터 준비된 입구 주변을 만지작거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유닛의 입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한다. 메티스의 타액은 갓 만들어진 것처럼 맑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발 근처에서 무언가가 느껴진다. 처음 한 번은 착각인가 넘기고. 두 번째는 명백히 발등에 입을 맞추고. 세 번째로 혀가 닿자 네바는 다리를 크게 턴다.
“아래에 뭐가 있어.” 일어나려는 그를 메티스가 붙잡았다. 허리춤의 공구 벨트를 단단하게 쥐어서. 그를 다시 밑으로 잡아당긴다.
“아니, 없어.” 네바는 모포 끝을 본다. 불룩 튀어나온 형체는 없었다. 한데 뒤엉킨 두 사람분의 다리뿐. 심지어 밑창이 두꺼운 작업용 신발을 여전히 신은 상태였다. 그가 다시 키스해 왔고, 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밑에서 누군가가 발을 움켜쥔다.
“뭐가 느껴진다니까?”
“그렇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것뿐이야. 옷도 제대로 안 벗었잖아.” 메티스가 키득거린다.
“… 착각?”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다시 본다. 자극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쪽쪽, 태연하게 입술을 맞부딪히며 사이사이 그가 말한다. 이번에는 반대쪽 다리도 누군가가 잡는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메티스의 손이 그를 누르며 막았다. 아니⋯, 입술이 도로 삼켜진다. 납작하게 깔린 채 세 명분의 애무를 받아낸다. 어쩌면 ‘명’이 아닌 단위로 세는 게 맞을지도. 균일하게 이어지지도 않는 자극이 몸 곳곳에서 랜덤하게 튀어나온다.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뇌가 함께 흐느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물어봐야 해? 손가락이 얼굴을 쓸었다. 이젠 입을 맞추지 않아도 자극이 이어진다. 당연하지. 힘을 쥐어짜 메티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상체가 바닥에서 살짝 뜨며 허리가 뒤로 휜다. 그럼 물어볼게. 신경망 조작해도 돼? 하지 마. 미친 새끼야. 정신을 놓지 않도록 몸을 가다듬으면서.
메티스는 그가 매달려도 강건하게 버틴다. 보니까 딱 적정하게 흥분한 것 같은데. 부정적인 신호 없이. 흥미로 가득찬 눈빛이 그물처럼 몸을 포박한다.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더는 거절할 의지도 잃은 네바가 헐떡였다. 공포는 성적 긴장감에 도움이 되거든요. 낮게 읊조리던 42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네가 물어보라고 했으니까 물어봤지. 난 들어줄 생각이 없을 뿐이고.”
사람은 이 정도로 자극이 심하면 못 버텨. 손가락 두 개가 액이 흘러넘치는 아래를 푹 찔렀다. 아니야, 잘 버티고 있어. 메티스는 대견하다는 듯 이마에 입을 맞춘다. 혹이 올라온 부분이 계속 간질거렸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혀가 음핵 주변을 자극하는 느낌이 시작된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에서 끊임없이 누군가가 허벅지를 만지고 핥았다. 몇 개는 도저히 사람의 움직임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 미칠 것 같았다.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추켜잡고 늘어진다.
“21% 남았어.”
뭐? 순간 불안감이 척추에 엄습한다. 뭘 상상하는 거야? 너 갈 때까지 21% 남았다고. 카운트다운까지 할 기세에 네바는 질색하며 고개를 위로 젖힌다. 엇, 방금 39%로 늘어났어. 어떻게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어, 흐, 네가 했지.”
메티스는 남는 손을 허리 밑의 뜬 공간에 집어넣는다. 등 가운데에 깊게 패여 길이 난 곳을 훑어 올리며 안아줬다. 네바는 속도에 맞춰 눈을 감고 할딱거린다.
정신 차려, 앞에는 메티스 하나뿐이야. 그의 세계 안엔 온전한 자극만이 남는다. 다시 19%로 줄었어. 처분을 기다리는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순간만큼은 조용하게. 메티스는 경련하는 몸을 단단하게 안아주었다. 눈에 불이 튀는 것 같다.
쾌락이 휘젓고 지나간 몸엔 창피함과 민망함이 남는다. 대체 여기서 유닛들하고 뭐 하는 걸까. 네바는 폐의 모든 공기를 끌어모은 다음에 모두숨을 내쉰다. 숨은 그마저도 얌전히 빠져나가지 않고 주인을 배반하며 간드러지게 떨었다. 메티스는 질척하게 목 주변에 입을 문대며 그를 기다렸다.
“계속 해야 익숙해질 거야. 인간이 잘하는 게 연습이잖아.” 메티스는 다시 그가 옷을 입는 걸 도와준다.
“또 하기만 해. 반절 죽여 놓을 거니까.”
“너 좋으라고만 하는 건 아닌데. 내가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팔꿈치를 들어 장난스럽게 빼죽대는 턱을 친다. 알았어. 얻어맞은 그가 마지못해 대답한다. 한마디만 더 하면 더 패려고 했는데. 대답과 다르게 흘러내린 작업복 위로 키스하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치기 어린 애들처럼. 강하게 빨아 들이며 영역표시 하는 꼴에 실소가 흐른다.
“질투라도 하는 거야?”
그런가 봐? 나는 리소스 독점욕이 있으니까. 여기 걔 손자국이 아직 남아있거든. 그는 당당하게 인정하며 계속 목 주변을 누볐다. 어느 쪽이든 흔적만 남기면 다인 건가. 내 몸이 지들 전장도 아니고.
“그만.”
유치한 기싸움에 네바는 그를 밀어내고 지퍼를 올렸다. 차가워진 옷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래. 나중에 봐. 난 빨리 몸 데웠으니까 외부 작업 한 번 더 나갈 거거든.”
열심히 하네? 네바는 의외라는 듯 그를 쿡 찌른다. 난 정말 나가고 싶다니까. 나도 진심이야. 메티스도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물러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 복도 끝의 불빛과 눈을 마주친다. 혹시 42가 봤을까. 새삼스럽게 볼이 달아올랐지만. 대부분의 일은 모포 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아니지. 보면 어쩔 건데.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인간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일을 마친 네바는 도망치듯 지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