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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셋 잇 오프

Volume 2

•DJG•8 min read



18. 셋 잇 오프 Set it off, 1996



“씹⋯,”

한참을 헐떡대다 겨우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치사하게 가슴을 때리는 게 어딨어.”

“눈깔에 임플란트 박은 애 얼굴을 어떻게 때리냐.”

“방금 맞은 데에 임플란트 다섯 개는 있어, 새꺄.”

통증을 가렸는데도 아직 잔상이 남은 것 같다. 캐스는 손으로 계속 가슴을 문지른다.

“어떻게 나가지?”

유닛으로 돌아선 네바의 목소리는 돌연 부드러워진다. 좀 전부터 마리는 멍하니 무언가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섹스로봇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다음 생엔 꼭 섹스로봇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적성에도 맞을 텐데 어쩌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네바는 빈정대며 마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우선 제어장치부터 풀겠습니다. 네트워크가 차단된 공간이라 틈이 생겼어요. 들키지 않게 작업하려면 몇 시간은 걸렸을 텐데, 들어왔을 때부터 최대 출력으로 해킹 중입니다.”

“얼마나 걸려? 오래 걸리면 나중에 떼도 돼.”

“위치 추적기가 달려 있어서요. … 아까처럼 재부팅이라도 하면 타격이 큽니다.”

목소리가 새침했다. 소유주는 뒤끝이 없지만 소유물까지 그럴 순 없겠지. 캐스는 방 안에 더 뜯을 것은 없나 둘러본다. 창문 없이 꽉 막힌 공간이라 괜히 더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해킹 모듈로 사피야의 책상을 열어 이것저것 뒤진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즈음에⋯, 아. 다행히 캐스는 작은 보관함을 발견한다.

“야, 이것도 열 수 있어?”

마리 앞에 내려놓는다. 자그마한 검은색 가죽 보관함이었다. 보안 수준이 높아서 제 모듈로는 열리지 않았다.

“처리할 여유가 없습니다. 못 열어요.”

앉아서 해킹에 몰두하던 유닛은 단칼에 거절한다. 굳이 시선을 돌려 보관함을 보지도 않은 채. 쟤가 날 볼 때는 어쩐지 흰자위가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

“거짓말. 너 소설 첫 장면이 전자 금고 0.3초 만에 따는 거잖아.”

이건 그 정도 레벨도 아니라고. 캐스는 네바를 보면서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낸다.

“뭔데?”

“사피야가 아끼는 거. 숨긴다는 것만 알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도 몰라. 뭐라도 들고 나가야지.”

흠. 네바 역시 그의 전략에 동의한다. 열어줘, 마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삑, 소리가 울리며 보관함이 열렸다. 이 앙큼한 것. 안에는 데이터 저장 칩 달랑 한 개뿐이었다.

“지금 내용물을 볼 순 없겠지?”

“함선에 도착하면 가능할 겁니다.”

제가 보관하죠, 마리는 캐스의 손에서 칩을 빼앗아 간다. 내 전리품인데. 캐스는 손목 내부에 칩을 숨기는 유닛을 야린다.

사피야는 밤새 이 안에 가둬둘 작정인 걸까. 생각하기 무섭게 사무실 안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 화재가 감지되었습니다. 화재 진압을 시행합니다. ]

뒤이어 조명이 꺼졌다. 문틈으로 새는 빛 덕분에 형태만 간신히 분간됐다. 칙, 머리 위에서 가스가 방출되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의 스피커에서 사피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보관함 열었어요? 안전장치가 왜 작동하지?”

“돈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나도 뭔가 챙겨야 할 거 아냐?”

캐스는 일부러 스피커를 향해 소리쳤다.

“그걸 어떻게…, 아직 안을 확인하진 않았네요. 지금이라도 그대로 돌려주면 무사히 빼내 주죠. 화재는 위장이지만 산소는 차단될 거예요.”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리 급하실까.”

“… 장부요. 내 윗선까지 얽힌 거라 함부로 건드리면 상당히 위험해질 겁니다. 당신 깜냥을 넘어서는 일이에요.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당장 돌려—,”

뚝. 그의 통신이 끊겼다. 불활성 가스가 밀려 들어오는 소리와 경보음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마리가 말했다.

“방금 통신 연결 때문에 사무실의 네트워크 차단이 해제됐습니다. 그의 보안망 전체를 공격했지만 곧 사무실의 산소 농도가 떨어질 겁니다. 바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 짜증 나! 협상 중이잖아! 아군에 경고는 하고 공격하라고! 캐스는 암시야로 선반을 더듬으며 사피야의 보관함을 미친 듯이 뒤졌다. 전리품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 했는데. 제대로 된 파일조차 보이지 않자 독이 바짝 오른다.

“그거 뗄 수 있겠어?”

네바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리를 챙겼다.

“분리는 거의 다 됐습니다. 남은 건 물리적으로 제거해 주세요.”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목덜미를 드러냈다. 저거저거, 지 손으로 떼면 되는 거면서. 캣이 떽떽거리는 동안 네바는 조심스럽게 단추를 잡아당겼다. 주르륵, 액을 머금은 신경다발이 길게 따라 나오다 끊겼다. 흉흉하게 돋아난 다발은 파닥거리며 장치 안으로 모조리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마리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진다. 몸체가 진저리 치듯 크게 떨었다. 네바는 안쓰러운 손으로 경련하는 유닛의 척추를 슥슥 문지른다.

“보안 카메라는 전부 셧다운했습니다. 가까운 유닛 3기 전원도 종료. 캐스, 그때 사용한 핑으로 유닛 위치 파악해서 탈출 경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는 못마땅하게 부탁한다. 네바는 그런 게 없거든요. 보안 전투형 유닛이라 저와 닿지 않게 최대한 비껴가야 하는데.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일부러 담지 않은, 그래서 더 냉랭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물었다.

“하아. 이미 경로 생각해 뒀어. 북쪽 게이트로 나가서 수상 셔틀로 곧장 함선 지역까지 뚫고 가자고. 유닛 감지되면 우회할게.”

“너 그거 운전할 줄 알아?”

“자동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운영하거든.”

“얼마나 아는 사람인데.” 슬슬 호흡이 가빠진다. 자꾸 캐묻기에 캐스는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믿을 정도는 돼.”

“사피야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흥. 정곡을 찔리자 허파에서 귀한 바람이 샜다.

“그러면 도시 골목을 대놓고 뚫고 가자고? 전투할 수 있어?”

“그냥 확인하는 데 왜 이렇게 발끈해. 출발하자.”

네바는 마지막 수분 보충을 위해 식은 테아닌 한 잔을 전부 들이켰다. 실은 스파에서의 여파로 몸이 전체적으로 나른한 상태였다. 누워서 잠이나 자야 하는 데 팔자에 없던 추격전이나 하게 생겼다. 심폐 강화 신체라 산소 소모가 커서 벌써 손끝이 저렸다.

캐스와 네바가 문 양옆에서 태세를 갖추는 동안 마리가 문고리를 잡았다.

“네바. 협상은 확실하게 결렬입니까?”

“응. 재갈 무는 건 딱 질색이거든.”

“알겠습니다. 열겠습니다.”

마리는 미련 없이 작업에 들어간다. 찰칵찰칵 순차적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사무실은 무기로 주울 것도 없어 맨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산소를 끌어모아 심호흡하자 빛이 새어 나왔다.

“우측으로 달릴게요.”

관자놀이가 당길 정도로 핑을 쏴댔다. 달리기에 적절한 호흡 패턴으로 바꿔 최대 속력을 낸다. 마리는 일부러 네바를 붙잡아 속도를 조절하며 캐스를 제일 선두에 뒀다.

배신자한테 경로 개척시키고, 잘들 하는 짓이다. 유닛을 피해 티격태격하며 계속 달렸다. 식별되지 않는 인간과 마주치는 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직원이 모두 빈 주방 구역을 뚫고 지나간다.

- 여기 코너 좌로 꺾으면 유닛 한 기. 순찰용.

그게 고까워 네바에겐 수신호와 군용 보안 통신으로만 명령내린다. 마리는 본인이 해독할 수 없는 채널에서 통신이 오가는 게 상당히 언짢아 보였다.

“좌에 유닛 한 기. 확인.”

그래서인지 네바는 인류를 배반한 채 꿋꿋하게 음성으로 수신을 재확인한다. 주방을 뛰어오는 동안 미처 칼을 집지 못하고 대신 쥔 커다란 국자를 들고선. 캐스는 그보다는 넓적한 프라이팬이었다.

둘 셋, 둘이 들어가서 유닛을 자빠뜨린다. 인간에게 선공을 입히지 못하게 설계된 기계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만은 경쾌했다.

층수가 점점 줄어들다 1층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직원용 출구 자동문 너머로 항구 쪽 불빛이 번졌다. 앞에 감지되는 게 있어 캐스는 걸음을 늦춘다.

- 앞에 한 기. 큰 거.

복도 끝에 형체가 보였다. 얕은 숨을 고르며 유닛을 파악한다. 키가 작고 넓적하게 생긴 유닛이었다. 머리 부분이 없는 대신 흉부 정중앙에 광학 센서가 몰렸다. 사람이나 생물을 모방할 의도가 전혀 없는 디자인이다.

“사피야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

네바는 눈치가 빨랐다. 캐스는 오래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모델이었다.

“저거 회수반이잖아. 인공존재 위협 대응청에서 뿌리는 거.”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리를 쿡쿡 찔렀다. 카메라만 죽이고 나온 게 아니군.

“… 연방 네트워크가 연결된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출력이 커서 비정상 침투가 감지된 것 같습니다. 뒤늦게 실수를 감지한 마리는 쩔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잘했다, 이제 함선 앞에 회수반 쫙 깔렸을걸. 사피야도 그건 못 막아.”

어쩌죠. 유닛의 손이 네바의 팔을 꽉 붙잡았다.

“어쩌긴. 일단 뚫고 가야지. 저것도 사람을 대놓고 못 치는 건 같지 않나?”

네바는 국자를 고쳐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멀찍이 움직임을 감지한 유닛이 반응했다. 굳이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무게중심을 낮춰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측면 관절을 노려 세게 쳐냈지만 움직임은 쭉 이어졌다. 곧장 이쪽으로 달려오기에 캐스는 빠르게 옆으로 튄다. 유닛의 묵직한 팔이 허공을 쳤다.

“썅, 치는데?”

팬으로 앞부분을 타격했으나 팬만 찌그러졌다. 쓸모없는 스테인리스를 던지고 곧장 금속 손가락으로 뒷부분의 포트를 찍었다. 전기 신호를 흘려보내며 막아서길 시도해 본다. 유닛은 밀리지만 멈추지 않았다. 캐스를 통과해 마리에게 직진하려는 순간 네바가 뒤에서 어깨 부근을 잡고 당겼다. 바퀴가 달린 지지대 관절 뒤쪽을 걷어차자 육중한 몸체가 확 기운다.

그건 굴하지 않고 팔을 옆으로 뻗어 캐스를 공격했다. 왜 나한테?! 미처 피하지 못한 캐스는 그대로 벽으로 날아간다. 쿵. 숨이 막히는 소리가 났다.

유닛은 마리를 재추적하고 질주한다. 마리가 민첩하게 뒤로 물러섰지만 공간이 좁았다. 첫 번째 타격이 피하지 못한 왼쪽 어깨에 들어갔다. 아직 이런 류의 체술 정보는 부족한 듯싶었다.

“마리, 힘으로는 안 돼. 정면으로 맞붙지 마.”

어깨 외장이 움푹 팼다. 네바가 크게 소리치며 달린다. 마리는 공격을 포기하고 벽 패널을 짚는다. 무언가를 이용해 교란 신호를 보냈으나 잠깐뿐이었다. 유닛의 몸체가 크게 진동하면서 멈추다가 마저 움직였다.

그가 달려드는 유닛의 센서 부위를 손바닥으로 누른다. 전류를 흘려보내자 관절 부위에서 스파크가 튄다. 파직, 타는 냄새가 퍼지고 마리는 전류 강도를 더 올린다. 순간 경련하던 회수반의 손이 정확하게 그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푹.

방금 제어장치를 떼어낸 자리였다. 마리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무릎이 바닥 타일을 부수고. 손이 유닛에서 떨어졌다. 프레임이 정지된 듯 그대로 고꾸라진다.

“마리!”

유닛이 두 번째 손을 들어 올리는 타이밍에 네바가 고함을 지르며 몸체를 들이받았다. 체중을 강하게 실어 밀어낸다. 유닛이 옆으로 쓸리며 벽에서 떨어진 캐스 쪽으로 밀렸다.

하. 캐스는 또다시 품으로 달려드는 유닛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방금 마리가 이용한 경로대로 최대한 과부하 신호를 흘려보냈다. 다행히 같은 부위를 연속으로 공격받은 회수반은 다리 부위가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네바는 체중을 모두 이용해 유닛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눌렀다. 스파크가 몇 번 더 튀다가 센서가 꺼진다. 유닛의 관절에서 힘이 빠졌다.

캐스는 손을 떼고 숨을 몰아쉰다. 불꽃이 계속 번쩍거리는 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오래 깨어있어 뻑뻑해진 기계 안구를 질끈 감아 보정한다.

“빨리 가자.”

네바는 마리에게 뛰어갔다. 무릎을 꿇은 채 멈춘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서기는 섰다. 다리가 제대로 버티는지 한 걸음 내디뎌보더니 멈춘다.

“반응이 좀 느려졌습니다.”

“뛸 수 있겠어?”

“뛰겠습니다.”

뛰는 모양이 평소랑 달랐다. 네바가 팔을 어깨에 두르고 둘이 같이 달렸다. 서러워해야 할 타이밍인가. 캐스는 먼지가 그득하게 묻은 바짓단을 대충 털고 뒤따라간다.

굳게 닫힌 자동문을 억지로 밀고 나가자 습한 밤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짠내보다 씁쓸함이 앞서는 항구 냄새. 이쪽 출구가 맞았다. 캐스는 두리번거리다 부두 끝에서 소형 셔틀을 발견한다.

기둥을 잡고 먼저 뛰어들었다. 철벅. 묵직한 강화인간이 올라타자 셔틀이 잠겼다가 올라온다.

나 잠깐 쓴다. 캐스는 냅다 지인에게 크레딧을 송금한다.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로 비수기 대여료의 열 배쯤을 던졌다. 다행히 바로 반응이 들어오며 시동이 걸렸다. 문을 열어주자 네바가 마리를 던지듯 집어넣는다. 모두가 따라 들어오자 곧장 문이 닫혔다.

“출발해.”

네바가 소리쳤다. 셔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멀어지는 부두 너머로 접근하는 물체는 없었다. 발각과 맞바꿔 보안망을 제대로 조져놓은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건물 내에서 울리는 경보음만 잔잔하게 들려오다 멀어진다.

으아. 캐스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는다.

“이대로 함선 지역까지 자동 운전입니까?”

“응.”

뭔가가 끊어진 것처럼 어색하게 벽에 기댄 마리가 물었다. 캐스는 눈을 감은 채 대답한다.

“마지막 휴식 시간이니까 쉬어 둬.”

“수고했습니다.”

이완은 아주 잠깐이었다. 마리는 바닥에 누운 캐스의 목을 움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