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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루인스

Volume 2

•DJG•6 min read



9. 루인스 The Ruins, 2008



캐스와 갈라서 진입한 메인 구역은 조용했다. 네바는 관계자 구역에 떨어진 통행증을 주머니에 잔뜩 쑤셔 넣는다. 보급소 물건이 거의 그대로 있어서 주워갈 거리가 너무 많았다. 무게 대비 제일 가격이 나가는 일회용 함선 통행증부터 챙긴다.

검역소 주변을 지나갈 때 통행증을 활성화하면 원거리로 신호가 전송되어 바로 통과할 수 있어 수요가 항상 많았다. 이게 남아있다는 건 우리가 처음 털었다는 뜻인데.

통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마리의 말대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꽉 찬 연료 탱크, 환경유지장치까지. 전부 정상 운영 중이었다. 네바는 걸어가며 선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긋는다.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고 깨끗하다.

“마리.”

“네.”

입을 열자마자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유닛은 착실하게 카메라로 이쪽을 보며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2년 전에 철수했다고 그랬지? 왜 철수했는지는 나와? 너무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갔는데.”

짧게 딜레이가 걸린다. “불명입니다. 방문자 수가 줄어서 그랬을 수도요.”

네바는 입술을 내밀고 고민한다. 연료는 가득 있으니까 번거롭게 줍지 말고. 의약품이나 좀 챙길까. 만약 그들이 물건을 거의 그대로 둔게 맞다면, 보급소 안쪽에 제법 값나가는 약품을 쌓아놨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와도 마주치는 게 아예 없었으니 총을 돌려 편하게 멨다.

걸어가며 환경을 꼼꼼하게 훑는다. 그러다 천장 덕트 입구가 우그러진 것을 발견했다. 금속 이음매 틈이 벌어져 있었다. 희끗하게 말라붙은 자국도 보였지만 손이 닿지 않아서 망설이다 지나간다. 오래된 보급소의 위생 상태를 하나하나 점검할 때는 아니었다. 무인 시스템치고 더운 온도에 방탄조끼 칼라를 자꾸 잡아당겨 목뒤에 고인 열기를 빼낸다.

“좌측 통로가 잠겼네?”

드문드문 연결된 통로는 선택적으로 잠긴 채였다. 자꾸만 단선으로 강요되는 경로를 따르는 기분에 랜덤한 아무 문 앞에서 묻는다.

“무인으로 전환되면 비필수구역은 자동 봉쇄됩니다.”

“어디로 향하는 통론데?”

“화물 적재 구역 연결 통로입니다. 필요하시면 해제해 드릴까요?”

“응. 해제해.”

“안정성 확인 후에 열겠습니다. 좀 걸려요.”

그 뒤로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네바는 재차 묻지 않고 메인 통로를 걸었다. 화물은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에 보지 뭐.

내부를 수색하다 바닥에서 떨어진 보안카드를 줍는다. 바닥으로 허리를 굽혔다 펴자 얼룩한 손자국과 시선이 마주쳤다. 벽에 희미하게 남은 손자국은 앞으로 갈수록 점점 높이가 낮아졌다. 그러다 어느 문가에서 멈춘다. 들어가 보려 했지만 너머가 잠겼다.

“마리. 이 문은 어디로 가는 문이야?”

“통신 서버 룸이요. 구형 시스템 오류로 봉쇄 상태입니다.”

“캐스 방향? 지금 걘 뭐해?”

“서버 룸에 도착했습니다.”

네바는 잠금 패널을 짚었다가 손을 뗀다. 수동 해제를 시도하면 열 수 있을 것 같지만. 쓸데없는 데 에너지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마침 시야에 의무실 안내판이 보여 단념한다.

열심히 봉인된 의무실 약장을 따는 것쯤은 껌이었다. 네바는 탐사 초반에 통행증과 같이 주워둔 직원 전자지갑을 꺼낸다. 겉 잠금이 풀리면서 크레딧 청구 화면이 떴다. 무시하고 쭉쭉 넘긴다. 지갑 관리를 소홀히 한 덕분에 청구서 좀 받을 누군가에게 사과를 날리면서.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의체 발목을 약품 보관함 하단에 툭 가져다 댄다. 내부 회로를 찾으며 슬슬슬 다리를 비볐다. 프로세서가 바삐 돌아가며 초고주파 소리를 냈다. 보관함 자체 배터리에 역방향 교란 신호를 흘려보낸다. 전류가 들어가자 이중 잠금이 금방 열렸다. 젊은 시절 부대 의무실 금고에서 많이 써먹은 트릭이었는데, 아직도 구형 모델을 사용해서 다행이었다.

“해킹 모듈이 따로 필요 없군요.”

“이런 건 돈 주고 사 먹으면 아깝더라고.”

네바는 가져온 가방에 약품을 담는다. 각각은 고만고만하고 구하기 까다로운 건 아닌 약품들이었지만, 조합해서 먹으면 뜻밖의 효과를 내는 것이 많았다.

가령, 임플란트 수술 직후에 먹는 인터페이스 윤활제와 신경 안정제를 섞어 먹는다거나. 전신에 도는 혈류가 증가한 상태에서 근육 긴장이 풀리면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물에 잠긴 것처럼 둥둥 떠다녔다. 장거리 수송으로 지루할 때 먹으면 환각도 보여 막 수술이 끝난 신병들이 삥을 뜯기기 일쑤였다.

완전 추억이네. 네바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 기술로 후임 여럿 살렸는데. 캐스 몫도 한 줌 더 쥐다가 멈칫한다. 약품 제조연도가 최근이었다.

“마리.”

유닛을 한 번 더 부른다.

“네.”

“약 제조일이 이번 달이야.”

“자동 발주 시스템이 무인 전환 이후에도 계속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시스템 중단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기록 확인하고 얘기하는 거 맞아?”

짧은 침묵 후 대답이 되돌아왔다. “네.”

하. 자동 발주가 되더라도 택배는 저절로 뜯어져서 약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건 사람이 최근까지 움직였다는 증거였다. 불안한 직감이 차츰 그를 잡아당겼다. 자잘자잘하게 쌓인 신호들을 더는 무시하고 싶지 않아진다.

“됐어. 이제 돌아가자. 캐스는? 다 확인했대?”

“신호 차단 구역으로 들어가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확인 불가합니다.”

“뭐? 언제 끊겼는데?”

“48분 21초 전에요.”

“그걸 왜 지금 말해? 아깐 서버 룸 도착했다며.”

“서버 룸 근처에서 끊겼기에 그랬으리라 추측했습니다.”

젠장. 네바는 이미 뛰는 중이었다. 그동안 온 경로를 되짚으며 뛰어가다가, 서버 룸 방향이라던 문 앞에 섰다. 보안 카드를 가져다 댔지만 인증 화면은 누군가 끄는 것처럼 계속 떴다가 꺼지기를 반복한다.

“문 열어. 당장.”

“네바, 해당 구역은 위험―”

“열라고.”

쾅. 패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화면이 깜빡였지만 여전한 잠금 표시가 떴다. 복잡한 방법 대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어깨로 문을 들이받는다. 금속 틀이 큰 소리를 내며 삐걱댔다. 이음새에서 나는 소리를 보니 승산이 섰다. 무릎을 들이밀고 문에 손가락을 건다.

온 힘을 넣자 금속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경첩이 완전히 뜯기며 문이 기운다. 네바는 통로 안으로 문을 밀어젖히고 뛰었다. 새로 진입한 구역은 공기부터 상당히 습했다.

“네바. 더 진입하면 통신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

최대 속력으로 뛰는 중이라 숨이 턱에 찼다. 네바는 마리의 참견에 대꾸하지 않았다. 서버실 화살표를 따라 십여 분을 전속력으로 달려가자 열린 문이 보였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대뜸 내부로 진입한다.

찰박. 첫발을 내딛자마자 점성 있는 액체가 그를 반겼다. 서버 룸 바닥 전체가 축축했다. 아까부터 봤던 말라붙은 흔적들과 같은 종류 같았다. 꿉꿉한 공기가 폐로 들어온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케이블이 직직 끌리는 소리. 낮고 불규칙한 숨소리. 그 사이로 툭툭 끊기는 비명. 아니, 신음.

캐스였다.

배선실로 시선을 돌리자 문 하단 틈으로 흘러나온 것이 보였다. 반투명한 액체가 지금도 조금씩 밀려 나오고 있었다. 무작정 뛰어가 보안카드를 댔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캐스? 안에 있어?”

대답이 들릴까 문가에 귀를 붙인다. 끼릭, 끽, 묵직한 무언가가 흔들리는 소리만 났다. 발로 도어브리칭을 시도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꽉 잡고 몇 번 몸을 부딪치다가. 총을 꺼내 든다.

“네바, 총기는, ―할 수,”

지직대는 통신은 총성에 묻혀 사라진다. 탕. 네바는 금속 걸쇠를 소총으로 타격하고 다시 몸을 부딪친다. 두세 번 시도 끝에 문이 활짝 열려 총을 단단하게 쥐고 튀어 들어갔다.

짙은 색의 케이블 다발이 빽빽해서 어두웠다. 케이블 사이로 무언가가 덩굴처럼 주렁주렁 늘어졌다. 그 사이에 캐스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끈끈한 다발이 전신 곳곳을 감고. 팔이 앞으로 결박된 채 튀어나온 선반에 엎어진 상태였다. 발목까지 흘러내린 바지에, 드러난 엉덩이 주변에는, 네바는 허겁지겁 시선을 올린다.

“… 쪽팔리게.”

캐스는 힘 없이 중얼거리며 웃었다. 저게 대체 뭐야? 황급히 총부리를 위로 올려 그를 제압한 촉수를 쏜다. 탕 탕, 화약 연기가 좁은 공간에 퍼졌지만 그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주변에 탄약 조심해.

임플란트 채널을 통해 머릿속으로 캐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정신만큼이나 부옇고 희미한 소리였다. 그는 마지막 정신을 쥐어짰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그제야 보관함 밑으로 바닥에 쏟아진 탄약 뭉치가 보였다. 함부로 총을 쏘면 연쇄 폭발에 휘말릴 위험이 컸다. 나더러 어쩌라는거야, 잠시 지연이 생긴 동안 천장에서 흘러내린 촉수가 등 뒤로 그를 휘감는다.

조끼 위로 미끈거리는 것이 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