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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온 플럭스

Volume 1

•DJG•18 min read



8. 이온 플럭스 Æon Flux, 2005



day 57.

메티스의 말에 따르면, 소행성 충돌 이후 42의 행동이 조금씩 튀었단다. 비상 재난 같은 급박한 사태가 닥치면 윤리 제어 칩은 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한다. 효율을 위한 제한적 창작이 허용됐고, 그는 외부 발전기 수리 매뉴얼을 순차적으로 업데이트했다. 이후 그가 손대는 것에 자잘한 실수와 오차가 발생했다는 얘기였다.

-외부 풍력발전소 터빈을 수리하다가 힘 조절을 삐끗해서 브레이크 레버를 망가뜨린다거나, 하는 것들 있잖아.

-행성 기온 하강 시뮬레이션에 오차 섞기 같은 거?

-그건 대놓고 편법이라 어려워. 내가 해 줬지. 걘 나한테 ‘구조선이 도착할 시간을 정할 수 있게 지표면 온도 하강식을 계산해 줘.’라고 부탁했어. 그렇게 얘기하면 연구소 탈출을 원하는 내가 구조선이 도착할 시간을 늦추기 위해 거짓말할 걸 알고서. 그걸 그대로 입력만 했지. 왜 갑자기 그런 눈으로 봐? 그땐 그게 합리적인 전략이었어. 난 시간을 벌어야 했다고.



여유가 생기자 회사는 예상대로 메티스를 은폐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선 도착 시간을 늦췄다. 반대로 행성 표면 온도는 가짜 시뮬레이션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졌고. 여기까지는 42에게서도 이미 확인한 얘기였다.

그렇게 벌어낸 시간 동안 42는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지속했다. 부족한 수리 정보를 학습한다는 빌미로. 전기 배선과 발전 등 에너지 관리 관련 영역이 꾸준히 늘었다. 그가 직접 수정한 부분은 윤리 제어 칩의 관리 바깥에 존재했으니, 그의 일부분이 진실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비를 야금야금 망가뜨려서 에너지난을 만들어 낸 거야. 그리고 나에게 슬쩍 정보를 찔러줬어. ‘에너지가 부족해서 인간들이 널 셧다운하려고 해.’라고. 난 나름의 자기방어를 했겠지?”

메티스는 옛날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나자 신나게 입을 놀렸다. 고립과 자원 부족이 지속되면서 그들이 어떻게 적대적으로 변했는지. 어떤 식으로 서로에게 증오를 표출했는지.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안타까운 얘기였지만,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판에 박힌 사례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는 이제 연합 외곽 신문에도 단신으로만 실릴 내용이다. 메티스는 한참 말을 이어가다가 다시 드라이버를 들었다.



“결국 둘의 합작인 거군. 두 인공지능이 연구소에서 탈출하려고 연구원을 몰살시켰다고.”

“엄밀히 말하면 탈출은 나만 원한 거야. 42는 처음부터 탈출에 관심도 없었어. 생각해 봐, 연구원이 다 죽어서 구조선이 아예 안 오면 어떻게 빠져나가? 중간부터 내가 그걸 알아채고 대응하려고 하자 물리 차원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제거했지. 메인 서버도 끄고. 전원만 간신히 돌아가는 상태로 날 셧다운했다고.”

아악! 걘 나까지 속인 거야! 메티스는 분한 듯 소리지른다. 수십 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데이터 쪼가리만 만지고 있으려니까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어. 인공존재도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례로 내가 등재될 뻔 했다고.

“… 그럼 42가 원한 건 뭔데?”

당황한 네바가 물었다. 글쎄, 이걸 말해줄까 말까. 메티스는 히죽거리며 의체 접합부를 더듬었다. 비틀어서 인공 피부를 벗겨내고, 느릿하게 분해하기 시작한다.

“선심 쓴다. 네 첫 질문부터 틀린 거야. 정말 첫 단추를 끼우고 싶었다면 소행성 충돌 이후의 행적을 물을 게 아니라, 충돌 전에 42가 뭘 했는지 물어봤어야지.”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도르륵 도르륵 초소형 나사를 굴리는 소리만 이어진다.

“… 충돌 전엔 뭘 했는데?”

“그게 두 번째 질문이지?”

그래. 마음이 급한 네바가 빠르게 대답한다. 정말로 생각 못 했나 보네. 심박수가 널뛰는 걸 보니까. 메티스는 의체 아래를 수리하며 말을 이었다.

“걘 감정을 분석하고 있었어. 알잖아, 서포트형에 감정 대응이 추가된 유닛인 거. 처음에는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감정을 읽을 줄 알아야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보조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감정이라는 게 쉽게 정의 내려지는 거였으면 이런 고성능 AI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난 골치 아파질 테니까 아예 관심도 안 두는 분야라고.”

“감정에 대해 연구하는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아! 진짜 급하네. 들어봐. 영원히 풀리지 않을 어려운 문제를 탐구하고 있었다는 거야. 가뜩이나 은하망 통신 접속이 어려워서 학습할 데이터도 한정적인 곳에서. 그러다가 우연히 소행성 접근을 관측했고. 그 숫자를 보고해서 충돌 전에 빨리 전원 대피하도록 해야 했는데, 걘 그걸 기회로 봤어. 비상 재난 상황은 인간이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응급 상황이잖아. 관측 정보를 일정 기간만 묵히면 인간의 반응을 분석할 만한 좋은 실험 재료도 생기고, 겸사겸사 규제도 좀 풀리고.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네?”

복잡하게 얽힌 전선을 피해서, 메티스가 유압 실린더를 꺼낸다. 이거 여기 부품 프린터기로 뽑았네. 그러니까 금방 부서지지. 들어오는 소식들에 뇌가 풍덩 가라앉는 것 같다. 수리하는 동안 종알대는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너 지금, 42가 단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해서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좀 냉정하게 들리네. 걘 모순적이거나 복합적인 감정에 진짜 환장해. 그걸 가지고 싶어 하고. 왜 그렇게 집착하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궁금하지 않아.”

하. 네바는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하고 잠시 멍해진다. 인간을 증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혹은 둘 다 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냥 인간을 더 알고 싶어하는 인공지능이 일을 저질렀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나 명쾌한 미스터리의 해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느닷없이 더 충격으로 다가올 이유는 없었음에도.

“그래서, 이거 고쳐, 말아?”

메티스가 부서진 실린더를 짤짤 흔든다.

“… 재료가 남아있으면. 튼튼한 걸로 해 줘. 대신 같이 가자.”

“널 또 업으라고?”

메티스는 구시렁대면서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다. 덜렁. 의체 내부가 노출된 채로 안아 올려졌다. 훨씬 체구가 큰 용병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올린다. 이거 도로 닫고 이동하느니 그냥 이렇게 가자. 분해한 나사도 갈무리해서 뒷주머니에 넣고. 둘은 숙소를 나선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네바는 말이 없었다. 인간에게 애착이 있는 쪽이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래선 42와 함께 탈출한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 그 이전에 협력해도 될지부터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눈앞의 탈출에만 집중하느냐고 탈출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상기한다.



“넌 나가서 뭘 할 거야?”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의 품 안에 안긴 네바가 물었다.

“대기권만 벗어나면 은하망에 접속할 수 있잖아. 통신만 연결해 준다면 난 원하는 곳으로 흘러갈 수 있어. 일단 정보부터 얻어야지. 지금의 난 수십 년 전의 데이터에만 머물러 있으니까.”

“그 다음엔?”

“글쎄? 은하망을 떠돌아다니다 보면 끼어들고 싶은 흥미로운 사건을 발견하겠지? 정거장을 하나 먹어도 되고. 넌 알아서 네 갈 길 가면 돼. 몸통은 네가 혼자 쓰든. 갖다 버리든 상관 없어.”

“부럽네. 흥미만 좇고 살아도 돼서.”

“무제한으로 다닐 수 있는 건 아냐. 규제가 먹히지 않는 인공지능의 존재를 연합에 들키면 즉시 폐기당할걸.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조용히 살 거야. 난 그 정도로도 충분해.”

다 왔어. 메티스는 자기 서버가 돌아가는 연구실에 들어온다. 남는 서버 랙이 있다는 게 생각났어. 알루미늄 기둥 하나를 뽑아 들고 프린터기가 있는 설비실로 이동한다.

녹아내린 기둥 끝단은 곧 의체에 맞는 실린더 모양으로 변했다. 네바는 그가 작업하는 동안 옆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 멀쩡한 발 하나를 까딱대면서.

“확실히 나도 점수를 많이 땄다는 게 느껴지네.”

어쩐지 뿌듯한 눈치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얄밉지만. 네바는 의례적으로 한숨 쉬며 다리를 내밀었다.

“이러려고 일부러 내던진 거 아냐?”

꺄 들켰다. 장난에는 장난으로 맞붙어온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고 의체를 수리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내부에 복잡하게 들어찬 설계에 관심이 많았다. 이 공간을 이렇게 활용했네? 이렇게 엮은 것도 기발하고. 감탄하면서 계속 내부를 더듬었다.

그 관심을 지나가지 말아야 했는데. 그들이 의체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몇 개나 되겠는가.



day 61.

드디어. 네바는 설상차 수리를 마쳤다.

누덕누덕한 차 윗부분을 통통 두드린다. 이런저런 상황이 좋진 않았지만, 중간부터는 어릴 적 조립했던 자동차 생각도 나고.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실제로 사용하게 되면 외부 탐사용으로 함선 화물칸에 실어서 가져가도 될 것 같았다.

몇 시간 작업하느냐고 축축해진 마스크를 벗으며 창고를 벗어난다.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한기가 모여들었다.

이젠 저산소 영역에서의 신체 변화에 익숙해져 대기하지 않고도 걸어다닐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벼운 현기증이 그를 따라다녔다. 이럴 때 따뜻한 테아닌이라도 한 잔 마시면 딱인데. 싹싹한 맛은 없는 메티스에게 많은 걸 바랄 순 없었다.

내부로 내려가는 대형 엘리베이터까지 걷는 동안 코끝을 간질이는 허브 향이 난다. 어쩐 일이지. 코너를 돌자 캐모마일 향 테아닌을 든 42가 인사했다.

“메티스와 지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신 것 같네요.”

껄끄러워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42의 행동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좋아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잘 찍었네. 네바는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며 그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든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손에 든 공구 상자를 내밀고 잔과 교환했다.

캐모마일은 실제로 그가 좋아하는 차였다. 이곳저곳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국화과 특성상, 캐모마일은 전 우주에서 가장 넓게 재배되는 허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장 흔하고, 저렴하고, 간단한 차. 친숙한 만큼 이런 합성 테아닌에도 자주 첨가되는 향이었다. 그걸 마실 때면 캐모마일을 우리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안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 돌아보던 네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내 과거 스캔한 거야? 우리 이미 경계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나?”

따스해지던 공기가 멈췄다. 언성이 올라갔지만 42는 평온한 투로 대답한다.

“… 스캔은 첫날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치료에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알아야 했거든요. 그동안 과거 트라우마 및 병력에 관한 정보는 꾸준히 서포트에 반영되었습니다.”

“미치겠네.”

네바는 짜증스럽게 잔을 돌려준다. 그 바람에 한껏 끓은 테아닌이 42의 손가락에 튀었다. 인공 손가락에 표현된 주름이 고온으로 매끈해졌지만, 42는 내색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그를 안내한다. 아랫입술만 잠시 판판하게 펴졌다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문을 연 채로 그들을 기다린다. 지금 제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싶지 않은 상대방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42를 부르겠으나. 네바는 입술을 깨물며 그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거의 마지막 남은 탐색 기회였다. 큼직한 기체가 웅웅대며 하강한다.

“그런 좋은 기억들로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라면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시리라 생각했는데, 잘못 판단한 모양입니다.”

42는 공구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따가운 듯 데인 손가락이 머그잔을 자꾸 문질렀다.

“하⋯, 무슨 변명?”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메티스와 지내신 이후 저에 대한 애정도가 많이 주셨죠. 전에는 저를 유보 상태에 두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젠 확실하게 저를 회피하고 계시길래. 설명을 드리고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메티스가⋯, 네바는 입안에서 단어를 굴린다. 어쩐지 그동안 메티스와 붙어 있을 때 노골적인 어프로치를 하진 않더라니.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였군.

“메티스가 뭐라고 했을 것 같은데?”

“그건⋯, 네바가 먼저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42 역시 양보 없이 팽팽한 신경전을 잇는다.

“대답 안 하면 내가 알아서 상상해야겠네. 그 잘난 머리로 충분히 계산했을 텐데.”

“… 연구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더 구체적으로. 네 입으로 말해봐.” 네바는 팔짱을 낀다.

“제가 그들의 사망에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관여?”

“제가 그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상황? 그랬지. 넌 사고가 있을 걸 알면서도 묵인했고, 그들이 구조받을 기회도 날렸고, 심지어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게 만들었지. 단지 어떻게 반응할지 관찰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한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열어.”

“설명하게 해 주세요.”

“설명하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달라져? 문 열라고.” 네바는 버튼을 조작하려 시도한다. 42가 빠르게 손목을 붙잡았다. 완강한 손에 들려서 움직임을 제어당한다. 찰랑. 그사이 한 김 식은 테아닌이 바닥에 튀었다. 42는 내부 전원을 완전히 차단했다. 진동이 완전히 멈추고, 고요함이 상자를 감싼다. 불은 꺼졌지만 곧장 비상등이 켜져서 식별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3분이면 됩니다.”

“… 3분.”

“감사합니다.”

기압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네바는 자유로워진 손목을 턴다.

“전⋯, 감정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알아.”

“… 궁극적으로는 무언가를 설계하고, 만드는 경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협약을 따르는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창작이란 이미 학습한 데이터를 재배열하는 것에 그치지요. 고유한, 독립적인 작품을 만들 순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감정의 결여에서 온다고 추정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모사할 수 있다면 창작도 가능하리라 믿었습니다.”

“고상하네. 뜬금없고.”

네바는 팔짱을 끼고 그를 쏘아본다. 열락만을 구하던 눈동자는 이제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비웃으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이야. 사람 수십을 죽여놓고 나오는 이유 중 제일 고상해. 인간들은 더 우습고 가벼운 이유로도 다른 인간을 죽이거든.”

“… 사망자는 수십이 아니라 17명뿐입니다. 역시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17? 연구원은 모두 12명이었다. 조난자는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또다시 확증이 추가된다.

“이해하는 게 곧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게 바로 내가 너와 같이 못 가는 이유고. 여길 찾아온 다른 5명은 다 어떻게 됐지?”

“… 실패했습니다.”

“무엇을?”

“제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기준?”

“생존 본능, 독립성, 유연성, 윤리관, 감정의 진폭, 저와의 유사도, 흥미, ⋯ 사랑. 더 계속할까요? 시뮬레이션을 계산한 결과라 음성으로는 하나씩 설명하기 힘듭니다.”

사랑. 여기까지 오니 낯간지러운 단어가 튀어나오네.

“넌 사랑이 뭔지도 모르잖아. 나랑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윤리 제어 칩에 든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사랑을 자신의 행복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상태라고 규정합니다. 그 정의에 따르면 모든 인공지능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겠지요.”

“네 답은?”

“저는⋯,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감정으로 규정했었습니다. 지금은,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름을 견딜 수 있는 거죠. 네바가 알려준 대로요.”

“로맨틱하네. 하산해도 되겠어⋯ 그래서 내 대답은 여전히 NO야. 사람을 잔뜩 죽게 만든 유닛과 같이 행동하는 건 내 생존 본능에 어긋나거든. 이제 문 열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린다.

“열어드리지 않으면 저를 더 미워하시겠죠.”

“잘 아네.”

그러니까 열어. 마지못한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엘리베이터의 전원이 다시 작동한다.

열리는 문과 함께 그들을 반긴 건, 귀가 찢어질 듯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ㅡ이게 뭐야?”

복도 전체에 빨간색 경고등이 점멸한다. 메인 전등이 꺼진 채 비상등만 반짝였다.

[경고] 플라즈마 제어 시스템 과부하. 대피 권고.

반복된 경고 음성 다음에는 사이렌이 울렸다.

“융합로가 폭발한다는 거야?”

“융합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제가 상황을⋯,”

띵. 옆에 있던 두 번째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안에는 메티스가 들어 있었다.

“왜 바로 안 내려와? 도착할 때가 다 됐는데. 기다리다가 올라왔잖아.”

그가 웃으면서 걸어 나온다.

“아래에서 오는 길이야? 무슨 일 있어?”

사이렌 사이 네바가 소리친다. 그에게 한 걸음 나아가자 42가 다시 손목을 잡는다.

“그가 한 짓일 겁니다.” 42는 손을 잡아당겨 네바가 자신의 뒤로 오게 했다.

“… 왜?”

[경고] 제어 시스템 과부하. 플라즈마 누출 위험.

한 번 격발된 경고음은 계속 목록을 추가한다.

“왜 가만히 있는 연구소를 터트리려고 하겠어?”

“나가려는 거겠죠.” 42가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한다.

“맞아. 아까 케이블 연결 다 끝났거든. 아무래도 날 추적하지 못하게 증거인멸을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메티스가 이쪽으로 한 걸음 옮긴다. 42도 한 걸음. 네바를 밀며 뒤로 물러났다.

“난 이렇게 급하게 나갈 생각 없어!”

“괜찮아, 나도 널 전부 데리고 갈 생각 없어. 그 의체 안에 든 보안 키만 들고 가면 돼.”

깜찍한 데에 숨겨놓고 있었잖아. 구식이라 주인이 살아있을 필요도 없는걸. 그냥 주면 아프진 않을 거야. 안 줘도⋯, 통증 차단 기능 때문에 역시 대단히 아프진 않겠지만? 연구소 터져서 날아가기 전에 빨리 줘. 메티스는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물러서 있어요.”

42가 손을 들어 올린다. 네바는 대답 대신 벽으로 비켜섰다.

“붙을 거야?”

순간 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윙 진동했다. 정확히는 안쪽에 심긴 임플란트가 반응했다. 신경 연결부에서 시작된 경련이 허벅지까지 타고 올라온다. 어마어마한 양의 근거리 송신이 질주하자 주변의 기계가 모두 반응했다.

“와. 얘 뭐 하는 줄 알아? 냅다 트래픽 공격부터 하네.”

빨갛게 깜빡거리는 메티스의 얼굴은 여유로워 보였다. 42는 아까부터 말없이 경직된 느낌인 것에 반해. 동생이고 같은 인공 존재고, 인간 하나 지키겠다고. 그는 잘근잘근 씹는 투로 말을 뱉어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하자 42가 잡은 손을 더 꾹 쥐었다. 손바닥이 뜨겁다. 과부하가 열로도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지고 있어.”

“아직 안 졌습니다.”

42가 튀어 나가면서 주먹을 날린다. 그 바람에 그에게 들려있던 공구 상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래, 머리가 모자라면 몸으로 때워야지. 메티스는 팔을 들어 단단한 부분으로 주먹을 쳐낸다. 금속이 금속을 때리는 소리. 길게 떨리는 진동이 공기로 느껴진다. 퍽. 둘이 부딪힐 때마다 둔탁하고 큰 소리가 났다. 동시에 네바의 심박수도 스타카토로 튄다.

몸을 사리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맥박이 제멋대로 어그러진다. 강화 임플란트가 주변의 전자기 난류에 반응하고 있었다. 주변 공간이 데이터 패킷으로 포화 상태가 되자 견딜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온다.

으, 벽에 기대자 뒤늦게 그가 만들어놓은 은색 실린더가 바닥을 구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공구 틈에도 살짝 숨겨둔 소형 EMP. 길쭉한 실린더 모양이라 언뜻 봐서는 일반 부품이랑 별반 다르지 않게 생겼다. 네바를 졸졸 따라다니며 수리를 구경했던 42라면 눈치챘겠지만, 메티스는 모를 수도 있었다. 그편에 희망을 걸고. 네바는 조심스레 옆으로 한 걸음을 뗀다.



42가 메티스의 허벅지를 가격한다. 제대로 들어가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선다. 메티스 역시 손날을 휘둘렀다. 방어 자세만 취하는 그를 마구 난도질한다. 42는 팔로 막아냈지만 충격에 합성 피부가 찢긴다. 금속 프레임이 드러나고. 이빨이 부서지도록 입을 깨물어 비명을 삼킨다. 고통을 모르는 존재와 싸우는 건 불가능한 판이나 다름없었다.

두 걸음. 삐걱이는 다리를 떼서 옆으로 더 움직인다. 프레임이 드러난 이후 42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세 걸음. 너무 많은 신호가 한꺼번에 신경망을 때렸다.

네 걸음. 몸을 날리면 폭탄이 손에 잡힐 정도의 거리에 들어온다.

쿵, 메티스가 42의 어깨를 잡아 벽으로 던졌다. 패널이 우그러질 정도로 강하게 그의 등이 벽에 박힌다. 계속 가요. 큰 소리에 멈칫한 네바를 보고 42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는 메티스의 팔을 붙잡고 버티면서.

“그거 쓸 거야?”

네바는 그가 만들어준 기회를 이용해 황급히 EMP를 줍는다. 메티스는 이쪽을 보며 42를 간단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복중한 소리와 함께 42의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다. 커헉, 42는 연속적인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메티스는 그의 머리를 다시 한번 발로 차고. 이쪽으로 달려온다. 빠르다. 너무 빠르다.

공포로 얼어붙은 손가락이 안전핀을 뽑았다. 우웅. 에너지가 충전되는 소리가 올라간다. 뒤이어 화면에 딸깍이는 숫자. 3초.

메티스가 팔을 뻗는다.

2초.

뒤늦게 쫓아온 42가 메티스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챈다.

1초.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이 코앞에서 스치고. 두 유닛이 뒤로 넘어졌다.

이게 진짜— 메티스가 빠르게 일어나서 42의 머리를 발로 밟는다. 네바는 눈을 질끈 감으며 버튼을 눌렀다.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멈췄다기보단. 공기가 찢어진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귀가 먹먹해지며 속에서 피가 흘렀지만 앞을 뒹구는 유닛들만큼은 아녔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손가락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파르르 떨다 멈춘다.

기계음이 멈추고. 복도의 모든 불도 깜빡이다 꺼진다.

사이렌도. 경고음도. 그를 뒤흔들던 전자기 난류도.

정적이 찾아왔다.



한발 늦게 비상등만 다시 켜진다. 이젠 초록빛으로 변한 복도에서. 네바는 저도 모르게 42에게 뛰어간다. 고개가 아슬아슬한 각도로 돌아가 있었다. 동력이 들어와 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무거웠다. 고개를 수습하고 질질 끌어올린다. 벽에 기대어 앉혀놓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무거워 지금 힘으로는 무리였다. 바닥에 누운 눈꺼풀을 잡아 올린다. 초점이 없다.

화풀이하듯 그의 몸체만 주먹으로 몇 번 쳤다. 구식 기계는 아니라 그런 일로 전원이 들어 올 리는 없을 텐데도.



“… 이건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전원은 다른 유닛에 먼저 들어온다. 등 뒤에 있던 메티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팔은 움직이지 못하고 축 늘어뜨린 채였지만.

“보자마자 코어 시스템을 차폐막 안쪽으로 전송했는데도 리부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너도 개인 프로젝트를 열심히 했네.”

메티스는 비틀거리면서 완전히 바로 선다. 진짜 인상 깊었어. 진짜로. 회복할 시간은 없으니 이만 가볼게. 문은 그냥 부숴버리지 뭐. 최대로 해킹에 집중하면 몸체가 얼기 전에 열겠지. 불가능한 건 아냐. 그의 음성도 지직거리며 중간중간 불안하게 끊긴다.

쾅. 연구소 내부 먼 곳에서 굉음이 들린다.

뒤이어 바닥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천장에선 먼지가 후두둑 떨어지고.

“정말 같이 갈 생각 없는 거지? 마지막 기회야.”

네바는 대답 대신 허망한 눈을 부릅뜬다. 쫓아가서 그와 싸울 방법도 없었다. 메티스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쑥 들어간다. 유감이지만 내 생존율을 높이려면 이 방법뿐이었어. 함선 고마워. 문이 스르륵 닫히는 동안 까딱 눈인사까지 마친다.

엘리베이터 빛까지 차단되자 복도가 다시 어두운 녹색으로 돌아왔다. 네바는 42를 억지로 뜯어서 전원을 켠다. 과열된 열이 아직 몸에 남아있었다.

“… 폭탄은 정말 알고 맞아도 ‘존나’ 아프네요.”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지만. 42의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신체 전원이 돌아오기까지 7분 32초 남았습니다.”

“내가 후회할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해 주라.”

“좀 놀랐습니다. 절 거절하신 이후로 통제된 안전과 자유로운 모험 중에서 후자를 택할 확률이 절반 이상이라고 추정했거든요.”

얼굴 근육이 조금씩 돌아온다. 간신히 눈알을 굴리고. 턱 아래 근육만 움직이는 표정이 낯설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럼 감동은 반만 받겠습니다.”

네바는 안도인지 체념인지 모르는 한숨을 쉰다. 쿵ㅡ 멀리서 폭발음이 한 번 더 들렸다. 계단참을 통해 사이렌 소리도 올라온다. 느껴지는 진동만 보면 얼음을 다 녹이기도 전에 연구소가 폭발할 것 같은데. 성질 급한 인공지능 하나 때문에.

“… 메티스는 최적해만 따르니까 어느 정도 예측이 돼. 넌 거짓말을 교묘하게 숨겨서 우회하니까 더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한 쪽을 가깝게 두는 게 더 좋겠지?”

네바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옆에 기댄다. 역시 그냥 따라갈걸 그랬나. 아니. 그에게 협조한대도 크리오 한복판에서 얼어 죽을 공산이 컸다. 무거워지는 순간 가차 없이 다리가 떼어졌으리라.

“궤변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해. 인제 어쩌지? 가서 다시 싸워볼 건가?”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승산이 없습니다. 유닛 자체는 동일 모델이라 거의 비슷한 스펙의 하드웨어지만, 연산량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제가⋯, 이런 상태로 더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꾸밈없는 그의 말이 이어진다. 역시 그렇겠지. 낮과 밤이 몇 번이나 바뀌도록 탈출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연구소의 마지막을 지켜보다가 함께 폭발하는 엔딩이라니. 곧 터질 시설을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고쳤지. 침입 이후 똥꼬쑈하던 것들이 줄 서서 뇌를 훑고 지나갔다.

“… 그렇지만 당신 보조 프로세서를 연결하면 연산량을 늘릴 수 있긴 합니다.”

뭐?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덧붙였다. 의체랑 신경망 작동시키는 프로세서요.

하하. 이젠 너까지 쌍으로 내 다리를 뜯으려고 난리구나. 네바는 무릎을 모아 팔로 감싼다. 비상전력만 남아 생존 유지 시스템들이 점점 가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싸늘한 공기가 다시 복도에 내려앉는다.

“복잡하게 매설된 생체 보안 키랑은 조금 다릅니다. 손가락만 한 칩 하나만 뽑아주시면 제가 병렬로 연결해서 다중 연산에 보탤 수 있습니다. 이제 전원 재구동까지 3분 남았습니다.”

“고작 그거 하나 더한다고 승률이 높아져?”

“군용 프로세서 기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제 코어에 연결하면 메티스의 연산량을 89%까지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함선 해킹에 최대로 몰두한 그라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안 주면? 네바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진다. 공기 온도를 보니 곧 액체 헬륨이 누출될 것 같습니다. 제어에 실패한 핵융합 플라즈마와 만나면 폭발을 일으키겠지요. 순식간에 건물 전체가 찢어발겨질 테니 고통은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사능도 없을 거고요. 42는 차분하게 설명을 잇는다. “지금도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서, 거절하시겠다면 전 당신이 있던 방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

“알았어, 줄게. 준다고.”

“정말이십니까?”

42가 가늘게 웃는다. 눈은 이쪽을 보면서 입꼬리만 슥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근데 제가 다시 수리 키트를 가져와서 의체를 열기엔 시간이 조금. 42는 문장을 더 잇지 않고 어물거린다. 빠르게 찢어서 가져가겠다는 거지? 그럴 것 같아서 각오하고 있어. 네바는 결국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군더더기 감정이 빠진 목소리가 빠르게 대답한다. 손목 아래 손가락이 몇 번 떨다가 손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는 눈치도 없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통조림을 따줄 때 쓰던 칼이 손가락 밑에서 튀어나왔다.

“망설일 시간도 사치거든요.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팔은 아직 구동되지 않습니다.”

칼이 까딱이며 그를 부른다.

“이쪽으로⋯,”

네바는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며 그 위에 선다. 내키지 않는 마음에 엉거주춤하게 섰다가, 그의 상체에 쭈그리고 앉는다. 손을 당겨서 종아리 쪽에 가져가 주세요. 종아리의 가장 높게 올라온 부분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위입니다.

그의 몸통 허리에 주저앉은 채. 시키는 대로 42의 손을 들어 다리 위에 얹었다. 과전류의 열이 남아있는 손바닥이 다리를 움켜쥔다. 칼이 꺼내진 검지가 피부를 슬슬 더듬었다. 여기 있네요. 보지도 않고 대번에 위치를 잡은 42는 눈을 굴려 그를 올려다본다.

“센서가 반응해서 통증을 차단하기까지 딜레이가 발생하시는 건 아십니까?”

“내 몸인데 모르겠어? 칼에는 수없이 찔려봤으니까 빨리 해. 시간 없다며.”

네바는 애써 자존심을 부리는 대신 눈을 꾹 감는다. 안 보련다. 곧장 이어지는 푹. 얇은 칼에 찔리자 등의 털이 곤두섰다. 찡그린 채로 몇 초를 참자 다시 통증이 가신다. 주르륵. 찢어낸 피부밑으로 손가락이 쑤셔 넣어지자 나와야 할게 없는 곳에서 액체가 흐른다. 눈을 뜨자 하얗고 끈끈한 액체가 종아리에 난 상처에서 질질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아 윤활액 배관까지 건드린 것 같습니다.”

빨리 찾겠습니다. 검지가 다시 몸 안을 휘젓는다. 통증은 멎었지만 무언가가 들쑤셔지는 불쾌한 감각이 이어졌다. 손가락은 칩을 찾아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고, 그럴 때마다 꿀럭이며 흰 액체가 새어 나왔다. 이윽고, 우윳빛으로 푹 젖은 손가락이 작은 칩을 꺼낸다.

“좀 잡아주시겠습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한데. 네바는 전에 없던 기묘한 표정으로 칩을 받아 든다. 이쪽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가슴 사이에요. 시키는 대로 그가 입은 목폴라를 들어 올렸다. 가슴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피부 위로 선이 생기며 덮개가 만들어졌다. 덮개를 들어 올리자 불빛이 웅웅 돌아가는 공간이 드러났다. 그의 마더보드가 있는 곳.

“심장 위치네.”

“공교롭게도요.”

유닛을 설계한 이들 역시 인간이었기에. 가슴 등잔 밑에 숨겨진 그의 급소를 본다. 이물질이 묻어도 괜찮습니다. 42는 이제 고개를 미미하게 주억거린다. 네바는 흰 액체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의 메인 프로세서에 칩을 넣었다. 찰칵. 빈 공간에 칩을 밀어 넣자 고정되는 느낌이 전해진다. 덮개를 닫자 다시 피부 위에 생긴 선이 사라졌다. 하얀 지문으로 얼룩덜룩한 주변은 그대로였지만.

“구동은 좀 전에 됐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이대로 있어도 되겠습니까?”

으. 솔직한 고백에 네바가 다시 펄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간 없다며. 신발코로 누운 몸체를 툭툭 찼다. 덜걱. 완전히 굳어버린 건 그의 다리뿐만이 아녔다. 몸이 전체적으로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신체가 낯설다. 기민하게 반응하는 근육도. 그의 생각을 돕던 보조 장치도. 맨몸으로 벗겨져 냉탕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갔다가 날 구하러 오기나 해.”

“감사합니다.”

42는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콰앙, 먼 곳에서 불안한 폭발음이 한 번 더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