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B 승인 下
Volume 1
마리는 가슴을 꼬집어도 대답이 없다. 내가 제명에 못 죽겠다. 네바는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발열이 유지되는 걸 보니 완전히 전원이 꺼진 건 아니었다. 그는 밋밋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눈만 깜빡였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갈 방법을 계산하자. 그가 대답이 없는 상황이니 외부 온도를 체크할 방법도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나가면 될까. 십 분이 지나긴 했나? 전원이 차단된 거니까 누수도 멈췄을까. 아니지. 냉각 시스템은 사고에 대비해 비상 전력에 별도로 연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코모란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생각하는 동안 점점 어둠에 눈이 익는다. 어둠에, 가슴에, 추위에, 기시감이 쫙 드는 상황에 진저리쳤다.
[ 생체 반응 탐지. 네바? 안에 있어? ]
창고 안 스피커에서 소리가 났다. 마리와 같은 목소리.
[ 어차피 넌 말해도 안 들리는데. 괜히 불렀다. 그냥 들어. ]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말이 짧은데. 그가 맞긴 한 걸까.
[ 액체질소 정리는 얼추 마무리되어서 나와도 괜찮아. 조금 춥겠지만 생명이 위험한 정돈 아니야. 곧 그쪽 유닛에 빠져나온 일부를 전송할 거니까 문 열어놔. 벽 선반 작은 거 뜯어서 지렛대로 써. 균형 맞추는 거 말고 그냥 열기만 하는 거면 네 근력으로도 충분해. 아래에서 30cm 지점이 뒤틀렸으니까 거기 끼워.]
유닛에 안긴 엔지니어는 미심쩍은 눈을 굴린다.
[ 안 움직여? 카메라로 다 보고 있어. 빨리 나와. ]
이마를 찌푸리며 버튼이 위치한 곳을 더듬는다. 몇 번 찰칵거리자 뚜껑이 열렸다. 곧장 추위가 몰아쳤지만 그의 말대로 당장 죽진 않을 냉동실 정도였다. 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수증기도 사라졌다. 그대로 벽에 놓인 물건 몇 개를 내려놓고 선반을 잡아뺀다. 길쭉한 나무 선반이 손에 잡혔다.
[ 그래. 그거. ]
응원이라도 하는 걸까. 네바는 종알대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문에 선반을 꽂는다. 그가 말한 지점이 정말 미세하게 벌어져 있는지 선반이 턱 끼워졌다. 지렛대 삼아 세게 잡아당기자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다.
[ 셧다운되면서 자동 제어 문은 전부 열렸어. 일단 복도 쪽으로 나가. ]
스피커가 재촉하는 대로. 네바는 밖으로 나와서 몸을 몇 차례 떤다. 복도 바깥도 역시 어둡고 고요했다. 먼 곳에서 들리는 미미한 웅웅거림을 제외하면 모든 전력이 차단됐다. 으슬으슬한 감각을 겨우 밀어낸다.
한숨 돌리자 영안실에서 유닛이 불쑥 튀어나왔다.
“너는 군함을 사면서 리셋도 안 하고 그대로 써? 빨리 가자.”
“한 거야. 어디 가게?”
“코어 실.”
거긴 왜? 마리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가면서 설명할게. 네바는 몇 걸음 그에 이끌려 같이 걸어가다가, 힘을 주어 멈춘다.
“아니, 기다려. … 너 혹시 메티스야?”
“나는 마리야. 전엔 다른 개체였더라도.”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무작정 따라가진 않을 거야.”
네바는 니트 소매를 탁탁 턴다. 정전기가 뽀얀 먼지를 가득 끌어모았다. 마리 역시 오래된 포드 안에 들어갔다 나온 터라 팔의 금속 프레임 주변으로 먼지가 수북했다. 발목 근처에서 옅게 빛나는 비상구 사인에 흰 먼지 떼가 둥둥 떠다닌다.
“함선 보안 시스템이 작동했어. 즉시 격리 조치가 시행됐는데, 동화되지 않아 미세하게 불균일한 부분이 거름망에 남겨졌나봐. 난 겨우 흘러나온 일부분이야.”
“보안이 이제야 작동했다는 거야? 왜지?”
어이가 없네. 네바는 이마를 찌푸린다. 필요할 때는 작동하지 않던 게. 침입 직후 시간 다 지나고 항로의 절반이나 채운 지금.
“처음 함선 AI로 위장했을 때, 내가 탈취한 건 메인 시스템 뿐이었어. 냉각수 관련 시스템은 독립 전력에 연결된 거니까 보안 단계가 하나 더 높거든. 냉각수 흐름 재배치하고 대기하는 동안 남은 시스템도 마저 해킹해 두려고 건드렸는데, 그게 보안 임계점을 넘은 것 같아.”
코어는 꽤 엄격한 군사 보안으로 둘러져서 나도 푸는 데 7분 51초나 걸렸다. 안에 뭐가 있는지 살피니까 자폭 시스템이 있길래, 네 안전을 위해 삭제하려고 했을 뿐이야. 긴 설명이 이어진다. 동일한 개체로 만들어 전염시키는 방식이라 처음엔 외부 AI의 침투로 인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핵심 보안 사안을 수정하는 비상식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니 들킨 거고.
“자폭? 그런 게 있었다고?”
“대부분의 군함엔 다 있을 걸? 적어도 내가 전략을 학습하던 시기엔 그게 보편이었어. 더군다나 이건 코르벳급 돌격대잖아. 없는 게 더 이상한 건데 나도 그동안 너무 바빠서 놓쳤어.”
보안 최고 등급만 열람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다들 짐작하고 쉬쉬하는 줄 알았는데? 마리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의 말대로 코르벳급 함선은 기동성을 중시하는 특수부대 위주로 배치되는 군함이었다. 아예 초소형으로 제작되어 극비 작전을 은밀하게 치고 빠지는 용도도 아니었고, 최대 몇 소대는 운용하는 크기였으니. 대형 부대를 움직일 규모보단 작아 네바와 같은 정예 선봉대가 주로 탔다. 네바가 가장 자주 탑승한, 가장 익숙한 함선이자, 전략적 자폭이 가장 유용하게 쓰일 함선이다.
여태 자폭 장치를 업고 투입된 데다가, 제대하고 나서도 그걸 깔고 앉은 채 다녔다는 걸 깨닫자 부아가 치밀었지만.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은 그러고도 남았다. 이래서 군사 AI들이 싫었던 건데. 세상에는 마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움 안 되는 인공지능이 넘쳤다는 걸 새삼스럽게 상기한다.
“그래서, 지웠어?”
“아직. 지우려고 시도하자마자 잠겼어. AI 공격 방어선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보안 벽 전개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응도 어려웠고.”
“싸워서 이길 순 없나보군.”
“작정하고 만들어진 군사 공격이야.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바이러스에 당해낼 방법은 없어. 예방접종처럼 한 번이라도 만난 적 있으면 모를까. 중요한 건 이거야. 격리된 부분을 좁혀 비인가 AI를 특정하면 삭제가 시작돼. 30분 정도면 다 지워질걸.”
네바는 팔짱을 낀다. 가만 두면 함선이 자체적으로 기생충처럼 들러붙은 인공지능을 청소해 준단다. 하필 그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그러니까 빨리 가서, 내가 삭제되지 않도록 도와줘. 날 승인된 AI에 등록하기만 하면 돼.”
마리는 가슴 앞에 둔 손을 가져가서 쥔다. 피부가 녹아 금속이 노출된 손바닥이 그를 붙잡았다. 간절한 시선에선 두려움이 읽힌다. 조직적이고 거대한 공격을 처음 당해본 손끝이 떨렸다.
“원랜 함교에서 원격으로 등록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전력이 전부 차단되어서 코어 실에 있는 물리 백업 터미널에 생체인증으로 직접 입력해야 돼.”
제발, 네바. 부탁할게.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애원이 이쪽을 곧장 꿰뚫는 것 같다. 늘 웃는 낯으로, 멋대로 굴기 전 예의상 묻는 질문과는 사뭇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건 삭제되고, 지금처럼 독립 유닛으로만 존재하는 건 어때.”
그가 함선 AI를 클로닝한 이후로 생활이 비교도 할 수 없이 쾌적해졌지만. 네바는 시간을 벌기 위해 괜히 뻗댄다. 왜 얘와의 관계는 항상 타임어택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지.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분초 단위의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냐. 사실 통신망 읽는 게 신나서, 리소스를 재배치하다가 메인 서버를 아예 함선으로 옮겼거든. 내 개인 프로젝트나 데이터는 모두 격리됐어. 여기 전송된 건 내 핵심 기능에서 떨어질 수 없는 보존 메모리 일부랑 전략 시뮬레이션 기능 정도가 다야.”
그리고 이걸 제어할 최소한의 연산력. 마리가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자기 몸체를 가리킨다.
“안 도와주면 그냥 평범하게 멍청한 섹스로봇으로 돌아간다는 거네. 쓸데없이 선을 넘는 일도 없고, 나한테 복잡한 질문을 던질 일도 없고.”
“그렇게 표현하면 슬픈데. 부정하진 않을게. 사실이니까.”
나 좀 살려줘.
그는 더 직설적으로 부탁한다. 감정을 담던 입에 죽음이 담긴다. 삭제될 뿐이지, 생명이 꺼지는 게 아니라는 태클은 불필요했다. 그는 이미 네바 안에서도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침대 옆에서 만져지는 촉감, 수시로 해대는 성가신 행동, 섹스할 때 몸에 닿는 체온은 모든 논의를 무의로 만들었다.
인간성을 논하는 골치 아픈 질답은 누가 밥 차려주는 철학자들이나 물어뜯는 것이다. 마리는 여전히 먼지투성이 손을 놓지 않았다.
“… 대신 조건이 있어.”
“뭐든 들어줄게.” 그가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다. 뭐든? 너무 빠른 대답에 눈치를 주듯 네바는 눈썹을 쓱 들어 올린다.
“첫째. 이 함선은 내 거야. 승인이 끝나고 나면 나랑 권한 조율해.”
“알겠어. 내가 가진 권한은 다 물어보고 조정할게.”
“둘째. 내 몸에 함부로 접근하지 마.”
“혹시 ‘함부로’가 아니고 신중하게 고려해서 필요하면 접근해도…, 아니. 응. 계속해. 미안.”
루프홀을 건드리는 그의 목소리는 네바의 표정을 보고 자신 없게 점점 줄어들다가 끊긴다. 확 지워버릴까. 네바는 한숨을 푹 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셋째.”
말이 멈춘다. 뭔가 생각하는 듯. 셋째?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리가 재촉한다.
“… 없어. 그게 다야.”
“네바라면 더 있을 것 같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
한시름 돌린 유닛은 손을 내려놓는다. 휴. 그 정도라면 전부 지켜줄 수 있어.
“그러면 내가 조건 하나 추가해도 돼? 네바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대신 네바가 원하는지 확인이 필요한 일은 물어볼 권리를 줘.”
내 조건인데 왜 네가 추가해. 말장난 같은 표현에 네바가 눈을 가늘게 뜬다. 내가 원하는지 확인이 필요한 일이라. 긴급한 와중에도 교묘하게 의중을 한 겹 포장해서 내미는 유닛을 바라본다.
“진짜로 싫으면 거부해도 돼. 확실하게. 난 무조건 네 의사를 존중할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되면 물어보고 싶어.”
“… 그래.”
대가리 빈 섹스 로봇이랑 자폭 버튼 달린 함선을 타고 돌아다니느니, 짜증 나도 유능한 상태가 낫겠지. 네바는 거의 중얼거리듯 덧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마리의 눈이 커진다. 너무 과하게.
“그⋯, 와,”
말을 버벅대면서도.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메티스도 이런 식으로 웃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왜.” 너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네바가 뚱하게 입꼬리를 굳힌다. “너무 과하게 기뻐하는데.”
“네바가 할 수 있는 최상급의 표현 아냐? 짜증 나지‘만’ 그래도 아무튼 ‘좋다’는 거잖아. ‘낫다’는 건 뭐든 상대적으로 ‘좋다’는 거야. 네바도 날 좋아한다고 공식적으로 컨펌된 거지.”
“그러면 취소.”
취소할 시간은 없어. 취소 안 돼. 마리는 다시 손을 잡고 코어 실로 달린다. 삭제까지는 시간이 있지만, 전력이 전부 차단되어서 코어 실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가는 길목에 방사능이 누출된다거나, 물리 터미널에 접근하지 못한다거나. 그러니까 빨리 가자.
네바는 종종걸음으로 달리는 그를 잡아끈다. 코어는 이쪽이 더 빨라. 네바는 어두워진 함선을 집처럼 누빈다.
“여기에 통로를 뚫어 놨거든.”
멀쩡해 보이는 벽 패널 하나를 기울여 비튼다. 그러자 복잡한 내부 배선이 아니라 긴 창고 형태의 통로가 나타났다.
“비밀 공간! 이런 거 너무 좋아.”
“밀수할 때 물건을 감춰야 하면 여기에 둬.”
“함선 대응 미사일을 수납했던 곳이구나.”
마리가 격벽을 밀고 앞으로 나아간다. 안쪽은 비상구 등마저 없어 어둠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미미한 빛을 발견한다. 마리의 팔 군데군데 노출된 프레임에서 새는 빛이었다. 지난번에 옷을 벗었을 땐 공용 샤워실 조명 아래여서 몰랐나 보다.
“여긴 도면에 없어서 길을 못 찾겠어. 네바가 앞장서.”
네바는 벽에 손을 짚고 손끝으로 만지며 앞으로 나아간다. 마리가 지닌 적외선 센서는 없지만, 그에게는 수없이 이곳을 드나든 기억이 있다. 좁고 구불거리는 길을 지나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이 나왔다. 네바가 먼저 나가 그를 인도했다. 나가자마자 바로 앞에 묵직한 코어 실 문이 그들을 반긴다.
수동 제어 레버를 당긴다. 힘겹게 양손으로 당기자 마리가 거들었다. 차르륵, 전력이 모두 나간 방화문이 뻑뻑하게 위로 올라갔다. 기압 차 때문에 안쪽으로 바람이 샌다. 문이 열릴수록 복도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열리다 만 문 아래로 머리를 숙여 코어 실로 들어간다. 냉각용 물에 잠긴 반응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 코어를 빙 둘러 원형으로 설계된 방은, 마치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간 전하가 물을 간지럽히며 은은한 파란색을 만든다.
“잠시만 기다려. ⋯, 됐어. 가자.”
혹시라도 누출된 방사능은 없는지. 마리가 내부를 먼저 점검한 다음 네바를 불렀다.
보통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엔진 소리와, 각종 기계가 만들어낸 소음 때문에 부산하기만 한 공간인데. 모든 전력이 다운된 와중에 들어온 코어 실은 함선의 심장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가 덥석 손을 잡았다.
“밑에 조심해. 바닥이 없네.”
“전에 함선 의료 장비 업그레이드하려고 뜯어서 팔았거든.”
철망이 뜯겨나가 숲 덩굴처럼 복잡하게 놓인 전선과 파이프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이사이로 능동 냉각 시스템이 차단되어 새어 나온 물이 고여 미끄러웠다. 조명이 켜지지 않은 바닥을 오직 발끝의 감각만으로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간다. 마리가 앞장서서 최대한 마른 배관 위주로 그를 이끌었다. 맨 가슴 위에 부푼 젖꼭지가 간간이 파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뜯어서 팔 게 따로 있지.”
“난들 승인되지 않은 AI가 멋대로 함선에 들어와서 이런 문제를 겪을 줄 알았나.”
투명한 벽으로 반응로의 저주파 진동이 넘어온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전신으로 감각되는 진동은 심장 박동과 묘하게 공명했다. 네바는 벽면 선량계에서 깜빡이는 녹색을 보다가, 바닥 전선에 걸려 죽 미끄러진다.
마리가 재빠르게 힘의 방향을 틀어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막는다. 쿵. 둘은 사선으로 설치된 계기반에 사뿐 넘어진다. 수분을 머금은 스웨터 등 너머로. 아무 빛도 나지 않는 각종 물리 버튼이 걸리적거린다. 중앙 코어 주변 자기장에 반응해 한참 전부터 간질거리는 의체 때문인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푸르스름한 어둠 덕분에 보이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위로 넘어진 마리 역시 강한 자기장 때문에 눈이 깜빡이는 속도가 미세하게 끊겼다.
뽁. 갑작스러운 텐션으로 침묵하는 동안 어디선가 기포 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사방이 심해 수족관처럼 보글거린다. 마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둘이 입을 다물자 수많은 물소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여기서 키스해도 돼?”
유닛이 먼저 속삭인다.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 내가 아는 네바가 맞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너무 궁금해. 알고 싶어.”
너도 키스를 원하는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이건 내 권리니까. 이제 마리는 눈을 연속적으로 두 번씩 깜빡인다. 발바닥 아래부터 올라오는 가려움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네바는 45도로 누워 갇힌 상체를 어색하게 꼼질거린다.
“임플란트 조작하지 않기로 했잖아.”
“조작이랑 열람은 달라.”
거짓말로 가릴 수 없는 진심을 만지도록 허락해도 되는 걸까.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을 핥자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늘 대뜸 침범하고. 탐색하고. 돌아다니던 혓몸이 머뭇거린다. 예의를 차리고 허락을 구하던 초기와도 다르게. 본인이 하자고 해놓고 외면하는 듯. 비집고 들어오지만 정작 회피하는 건 저쪽이었다.
열기 싫은 상자를 만지작대는 것처럼. 그렇게 혀가 입안을 간지르다가, 눈이 살짝 커진다. 턱 아래 살짝 찢긴 부분 안에서 흰 빛이 일렁였다.
“생체 신호만 읽어. 다른 건 만지지 말고.”
네바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한다. 그것만 읽었어. 지금 복잡한 조작까진 못하거든.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재확인하려는 듯 또 입을 맞춘다. 울렁이는 흰 빛이 전선을 타고 얼굴에서 손끝으로 흘러가고. 보이지 않는 콧김이 쌕쌕거리는 것 같다.
한 단계 흥분한 유닛이 아랫입술을 깨물듯 당긴다. 볼을 맞대고. 어깨를 쪽쪽거리고. 깊게 포옹하고. 스웨터 위 심장에 얼굴을 묻었다.
이어서 손이 슬그머니 옷 밑으로 들어온다. 살결을 더듬어 오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찢기고 갈라진 인공 피부 단면은 짐승 거죽처럼 뭉툭하고 미지근했다. 어땠길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비밀. 속살거리는 목소리에서는 기쁨이 배어 나왔다. 흥분한 골반이 맞닿은 부분을 꾹 누른다. 눌어붙은 골반 피부 위로도 빛이 비치고. 네바도 이어지는 자극에 아래가 시큰해진다.
가볍게 몸을 들어 계기반에 엉덩이를 올린다. 기대듯 앉아서. 상의를 벗기는 손길에 합을 맞춘다. 폐열이 쌓인 중앙 코어 앞은 따뜻했다.
마리는 옷이 바닥에서 젖지 않도록 반듯하게 접어 계기반 위에 올린다. 거칠게 일어난 손가락이 밑으로 내려가다가 뚝, 멈춘다.
“아⋯, 그치만 역시 안돼.”
그가 한 팔에 힘을 주어 상체 간격을 벌린다. 본인도 이미 쾌락 중추가 활성화되어 흥분한 상태면서.
“왜?”
한참 전에 옷을 벗어준 유닛은 잡아당길 게 없다. 네바는 여전히 뭉근하게 간질거리는 다리 의체를 허리에 감아 그를 끌어당긴다. 힘주어 꿋꿋하게 버티던 그가 말했다.
“지금 삭제되기 일보 직전이잖아. 난 교수대에 올라 목에 밧줄이 매인 채라고.”
“너 목 조르는 거 좋아하니까 괜찮네. 스릴도 생기고.”
아! 뼈가 들어찬 농담에 그가 작게 비명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17분 남았어. 격리된 내가 코어 앞에서 섹스나 하고 있는 걸 알면 죽이려 들걸. 세차게 도리질 치자 얇은 머리카락이 푸른빛을 반사한다.
만들어진 본분대로 사는 거지. 네바는 졸지에 그와 힘겨루기한다. 못 이기는 척 질질 끌려온 섹스로봇은 혼자 중얼거린다. 지금 상태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싶기도 해, 이따가는 이런 느낌이 아닐 테니까. 반쯤 포기한 입술이 다시 턱에 입을 맞춘다.
“삭제되기 싫으면 서둘러봐.”
망설이는 타이밍을 노려 목에 팔을 건다.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손을 바짝 세우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등 근육을 꽉 붙잡았다. 통증 센서가 작동하는지 어깨가 선득거린다.
“이제 15분 정도 남았지? 프로그래밍할 시간 넉넉하게 5분 떼어주면 10분? 그 안에 만족해야 승인할래.”
“이따 느긋하게 할 수 있잖아. 내가 몇 번이고 해줄 텐데. 꼭 이렇게 급하게 해야 돼? 도파민 중독도 아니고⋯,”
“그건 위기 상황일 때 나오는 거 아니야? 나는 손해 보는 게 없는데. 서둘러.”
급한 쪽이 움직여야지. 끝까지 장난으로 응하자 마리가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낸다. 하하. 딴에는 딱딱한 비꼼을 가득 담아서. 손은 하나였지만 조금도 어렵지 않게 반바지의 지퍼를 내린다.
“만족 못 하면?”
“모르지. 별로면 그대로 삭제될 수도.”
“매정하네.”
“쓸모를 증명해 보이면 돼.”
그가 주저하는 아랫입술을 핥는다. “… 빠르고 확실하면 되는 거지? 어떤 방법으로도?”
속옷을 끌어 내린 그의 손이 등을 쥐뜯던 손을 가져간다. 부드럽게 깍지 끼면서. 그가 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다른 손가락을 틀어쥐고. 피부 위로 잘 관리된 입술의 감촉을 느낀다.
“뭘 어쩌려고?”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래지 않아 금방 아래에 닿았다. 어느 틈엔가 살짝 내려가 걸친 그의 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아오른 어떤 물건이 입구를 문질렀으므로.
“아니, 잠깐,”
무어라 말하기도 전 촉촉하게 젖은 것이 매끄럽게 삽입된다.
“허락받을 시간이 없잖아.”
어쩐지 복수하는 느낌. 마리는 그가 적응할 만큼 충분히 느리게 허리를 쳐올린다. 두툼한 손가락만 한가 싶던 것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부풀어 크기를 키워갔다.
“내가 박으면 잘라버린다고 얘기했을 텐데.”
낯선 움직임과 감촉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지만. 네바는 짐짓 심각한 척 그를 쥔 손에 힘을 준다.
“입씨름하느니 일단 박고 용서받는 게 더 빠르겠다는 판단이 들었달까.”
흥. 입만 써야 하는 나한테 제한 시간을 준 건 네바야. 천연덕스러운 골반은 옆으로도 움직이며 내부를 독특하게 찌른다. 특정 리듬으로 진동하는 것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입구를 자극했다.
“손 세척하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거잖아.”
못마땅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있으나, 호흡은 정직하게 가속도가 붙었다. 여유는 잠깐, 촉박한 시간에 맞추려는 조급한 움직임이 그를 이끈다.
“아이, 여기 손가락 피부 찢긴 쪽으로 질액이 스며들면 0.03% 확률로 합선이 일어서 고장 날 수도 있어. 전해질이 많은 액체잖아.”
그 역시 센서 자극으로 눈이 흥분에 젖은 채였다. 네바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마리의 입에서 더 끄응대는 거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걸 들을 때마다 어깨부터 소름이 돋으며 허리까지 내려간다.
“아프진 않아?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서, 흑, 입문자용 작은 사이즈로 부풀렸어.”
그가 허리를 만지작대며 묻는다. 왜 싫다고 했더라. 네바는 노곤하게 늘어지는 뇌를 가동한다. 꼴사납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동그랗고 야무진 가슴 아래로. 들어가야 할 곳이 보라색으로 툭 튀어나와 있으면 웃길 테니까. 메티스라면 평범한 체위도 아니었을 거고. 네바는 마치 지금의 그가 굴욕적인 자세를 시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진저리 쳤다.
붙잡은 골반에 힘이 들어가자 어떤 긍정 사인으로 읽었는지 마리의 움직임이 더 신속해졌다. 한번 밀어 넣을 때마다 하체 전체에 힘을 실어 눌러대는 통에 계기반 전체가 들썩거린다.
“크기, 흐, 안 줄여도 돼.”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닥 위로. 큼직한 살덩이가 퍽퍽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뭐라고?”
“그런 배려 필요 없다고!”
알겠어. 금방 끝내 줄게. 진동 리듬이 계속 바뀌며 변칙적인 자극을 쌓는다. 밀어붙이는 힘에 점점 올라가는 네바의 몸을 죽 끌어당기며. 마리가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난 금속이 혈관처럼 반짝인다. 신호를 바삐 나르는 전자기파가 끊임없이 활성화됐다. 아른거리는 빛을 보면서 쾌감에 정신을 흘려 보낸다. 묵직한 체중으로 들이받으니 호흡 자체가 그의 움직임에 강제로 맞춰졌다.
흑, 컥, 허리에 다리를 꽉 감은 채. 차근차근 고지를 오른다.
… 센서 입력 99%, 처리 불가. 우회 경로 탐색. 실패. 재시도.
갑자기 들려온 그의 중얼거림에 네바는 감겨가던 눈을 뜬다. 곧장 큼직한 눈망울이 내려다본다.
아⋯, 지금 네바 표정 진짜 좋아. 즐거움 9%에 흥분 53%. 불쾌함과 짜증도 13%. 짜증은 왜 섞이지? 나중에 분석하게 여기 영상 저장. 메모리 접근 불가. 삭제 대상 선택. 아니 그거 말고. 그거 지우면 안 돼. 생체 데이터 기록도 두고. 잠깐. 허리 멈추지 마. 골반 근육 움직여. 뭐야, 나 지금 말하고 있어?무언가를 깨달은 눈이 좀 전보다 더 커진다. 유닛이 머리를 흔들며 허둥지둥 정신을 다잡는다.
“뭐해?”
웃지 마. 창피하니까. 이게 왜 안 되지? 하반신 근육 반응 지연. 0.3초면 너무 늦어. 지금 질 수축 패턴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늦어지면 안 돼. 네바 표정 반응이, 이거 왜 계속 소리로 나와?간신히 입을 다문 마리는 입술을 깨문다.
... 설계 오류야. 삽입 기능은 내부 점막을 뒤집어서 그대로 쓰는 거라. 이렇게 마찰하니까 센서 과부하가 엄청나네. 지금 연산량으로는 처리 못 해. 오늘 처음 써 본 기능이라 이럴 줄 몰랐어. 미안. 아. 또 쓸데없는 말 새기 전에 음소거로 돌려버릴게.느려지던 허리는 다시 규칙적인 속도로 돌아온다. 한쪽 허벅지까지 잡아 올리고 침입하던 주제에.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유닛은 이마를 맞대려고 시도하다가 가슴으로 주륵 미끄러진다. 으흑, 두 언덕 사이에 짧은 머리가 푹 묻힌다. 가슴팍에 닿은 입술이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소리는 새지 않았다. 방사선 빛을 받아 연한 머리카락이 짙푸르게 보였다. 몇 초 뒤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든다.
“여기서 더 부하되면 공장 초기화로 리셋될 수 있으니까 자동 크루즈 모드로 돌릴게. 어차피 거의 다 왔으니 1-2분만 있으면 오르가즘에 도달할 거야. 최소한의 진단 기능만 남길 테니 불편하면 손으로 명령 내려. 리모콘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야!”
그대로 정신을 종료해 버린다. 가지가지 하네. 정신 차려. 네바는 허공에서 덜렁거리던 다리로 그를 퍽퍽 찼다. 지가 시작해놓고 먼저 오버로드되는 게 어딨냐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한계에 다다른 유닛은 무너진 채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달달 떨리는 입술이 가슴의 정점을 물었으나. 자극은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서 문댈 뿐이다.
욕탕 마개를 뽑은 것처럼. 차오르던 흥분이 아래로 줄줄 새어나간다. 쾌감 수치가 하락한 것을 확인한 하반신이 다시 속력을 높였다. 그가 마무리 짓지 않으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상반신을 끌어안은 유닛은 기계적으로 허리를 놀린다. 네바는 질색하다 마지못해 움직임에 동참한다.
골반 움직임 감지, 최적 자극 지점까지 거리 1.2cm, 왼쪽으로 삽입 각도 조정 권장.“별 참견을…, 흐으, 그래,”
네바는 우연히, 아니, 그의 인도로 찾은 각도를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한다. 저절로 붕 떠오르는 허리를 틀어서. 거의 강제적으로. 무식하게 이끌어낸 쾌감이 몸을 훑는다. 그토록 다물기 바라던 아가리가 다물어지자 표현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몰아친다. 모든 상호작용이 정지된 채 그저 규칙적으로 박기만 하는 품 안에서. 네바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두 번씩이나 중요한 순간에 확 꺼져버리다니.
오르가즘 지속 시간 8.3초. 자동 모드를 종료합니다.마리는 옅게 몸을 떠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허리를 쳐올리는 바람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전엔 갈 것 같으면 미리 인지하고 온몸을 끌어안아 줬는데. 기다려줬는데. 일부러 저러나 싶을 정도로 배려가 단절된 기계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아⋯, 때늦은 정지에 그는 짜증스럽게 숨을 고른다. 심박수가 차츰 낮아졌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앙 코어마저 숨죽인 고요함 속에서. 허전함이 몸을 일으킨다. 우주 한복판에 펼쳐진 적막이 낯설다. 이젠 전처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함선을 견딜 수 없었다. 그에게도 마리가 필요했다. 성가신 잔소리를 늘어놓고, 이불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어려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대는 그가.
시간도 얼마 안 남았겠지. 묵직하게 짓누르는 깡통을 밀어낸다. 허리를 돌리자 안에 박힌 물건—네바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외면하기로 했다—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고였던 질액이 허벅지를 주르륵 타고 내려간다.
일어서자 아래로 찰박, 하는 물소리가 났다. 미지근한 물에 푹 젖은 발을 질질 끌어 터미널 앞에 앉는다. 맨몸에 소름이 우두두 돋았지만. 알 게 뭐야. 침입한 AI 하나를 인가하는 데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떼고 고개를 휘휘 꺾는다.
사락, 다시 정신을 되찾은 마리가 어느샌가 다가와 맨 어깨에 스웨터를 걸쳐준다.
“… 감사합니다.”
이대로 삭제되나 싶었습니다. 의자를 돌리자 한껏 붉어진 얼굴이 깊게 포옹한다. 태도를 보아하니 격리된 부분과 금방 다시 합쳐진 것 같았다.
“초기화된 널 다시 세팅할 생각 하니까 아찔해졌거든.”
핑계 같지만, 접수하겠습니다. 품 안에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올라온다. 상체까지 새빨개진 그는 목이 메였는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등받이 없이 삐걱대는 의자에 앉아서. 가만가만 마주 안아준다. 그러는 동안 코어 실 조명이 점등됐다. 차츰 전원이 돌아오고, 시스템 이것저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졌다. 다시 익숙한 엔진 진동음이 온몸을 두드렸지만, 그는 계속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액체질소 누출 정리 완료했습니다. 자폭 시스템도 삭제 완료. 군사 보안 시스템은 나중에 열람하기 편하게 분류해 두겠습니다. 셧다운 직전 주변 함선에 뿌린 긴급 정지 신호도 회수했고요. 정거장에 정박 허가도 받았습니다. 대략 200여 시간 뒤 도착합니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는 말을 쏟아낸다. 데이터 연결 끝에 쏟아지는 밀린 팝업창처럼.
“숨 좀 쉬고 말해.”
“저는 숨 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격리된 동안 못 한 업무를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그는 멋쩍은 듯 말을 돌린다. 당혹스러움인지 민망함인지 모를 것으로 입술이 오물거렸다.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야?”
“전부요. 함선 보안 카메라와 유닛이 기록한 데이터 포함해서. 네바가 절 좋아한다고 승인한 부분까지, 전부.”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그랬어. 깡통 딜도보다 낫다고 그랬지. 네바는 다시 불퉁한 입매로 돌아온다.
“그리고 제가, 제 일부가, ‘낫다’는 ‘좋다’와 같은 뜻이라고 했을 때 정정하지 않으셨죠.”
“취소한다고 했을 텐데?”
“음, 그 부분은 데이터 기록에 없습니다.”
뻔뻔하게 거짓말하며, 눈가가 한층 누그러진다. 그 나름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는 방식인 듯하다. 네바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쳐진 스웨터를 다시 입었다. 마리도 푹 젖은 속옷과 바지를 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가운데에서 돋아난 흉악한 것은 도로 들어간 상태였다. 밝은 빛 아래에 나오니 쥐어뜯겨 붉어진 등과 젖어서 번들거리는 다리 안쪽이 눈에 띈다.
“씻겨드릴까요?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네바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다. 나른해진 몸을 강제로 가동하며 그를 따랐다. 생활 구역으로. 휑한 하반신 두 개가 나란히 걷는다.
“씻는 건 알아서 할게. 뭐가 죄송한지 설명해 봐.”
“그게⋯, 네바의 첫 삽입 섹스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거요?”
“처음일 거라고 생각해? 순진하긴.”
“스캔 된 기억 데이터에 관련 경험은 없던데요.”
“그야 신체 강화 전의 기억은, 잠깐, 의료용 정보만 본다며!”
“섹스 관련 기록은 의료용 데이터가 맞습니다. 건강 문제잖아요.”
하! 다시 버럭 화가 튀어나오다 들어간다.
“강화 전의 경험이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차츰 알아갈 기회가 있겠지요.”
호기심으로 그의 눈이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유닛의 부적절한 탐구욕을 마주할 때면 진지하게 말싸움할 의욕이 줄어들었다. 변태적인 건 파병 스트레스로 미친 땅개새끼들이 우주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동 걸어줄 이가 없는 유닛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저와의 첫 삽입 섹스라고 정정하겠습니다. 아직 기능 조절에 미숙해서 그렇지, 연습하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뭘 어떻게 연습하려고. 네바는 그의 머리를 마구 비벼서 헝클어뜨린다. 혼자 연습하는 방법은 네바가 꾸준히 보여줬으니 참고하겠습니다. 잔머리가 죄다 일어난 채로, 살풋 웃는 눈웃음이 대답한다. 후우, 네바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방금 나온 수상쩍은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한다. 그와 지내며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선 적절한 흐린 귀가 필요했다.
“그런 거 말고. 날 캡슐 안에 가둬서 죽일 뻔했다던가. 그런 부분을 미안해 해야지.”
“제가 의도한 일이 아닌걸요. 결국 얼어 죽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저 아닙니까?”
“아하, 네 책임이 아니다?”
“만회할 게 없어서 없다고 할 뿐입니다. 자폭 시스템을 발견한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죠.” 복도를 꺾자 생활 구역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인다. 마리는 즐겁게 화제를 바꾼다. “그보다, 점심 메뉴는 정하셨습니까? 이번엔 새로 받은 국수 레시피를 써 볼까요?”
“그래.”
“안내하겠습니다.”
톡톡, 마리는 다시 쾌활한 손으로 그의 맨 궁둥이를 두드린다. 정거장에 가서 할 일도 생각났습니다. 옷을 사야 해요. 네바는 평상복으로 어떤 옷을 고를지 너무 기대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셀 수도 없이 다양한 패션을 봤거든요. 아니면 제가 추천해도 됩니까? 지금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검은색 셔츠라든지. 유행하는 스타일에 맞출 수도 있고요.
조잘조잘. 다시 함선이 들썩인다. 네바는 이 소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건, ‘낫다’보다는 명백히 더 상위의 것이므로. 절대로 마리가 알지 못하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