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녁과 아침과 밤
Volume 1
2. 저녁과 아침과 밤 Evening and the Morning and the Night, 1987
밤은 정말로 길었다. 그를 수액 바늘로 찌르려고 환장한 유닛과 단둘이라면 더 길었다.
42는 계산 끝에 섹션을 나누어 전력을 배당했고, 시스템이 꺼진 채 폐쇄된 공간이 늘었다. 가뜩이나 좁은 영역인 데다 비슷한 풍경뿐이라 질릴 법도 했지만. 이유 모를 생존 본능이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다. 그는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고 수시로 연구소를 순회했다. 벽이나 목발을 짚고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바깥의 바람 소리에 공명하듯 공간이 묘하게 웅웅거렸다.
-내가 뭐라도 할 일이 없을까? 엔지니어링 쪽엔 자신있으니까 연구소 수리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거주 구역에만 머물 것을 권장드립니다. 생존 시스템이 불안정한 지역이 많아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시스템을 고치면서 영역도 넓히고 에너지 효율도 높여 보겠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방어적인 태도에 몇 번 요구하다 심심하게 지낸 것이 아마도 며칠. 들고 다니던 스마트 패널도 작동하지 않고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중이라 날짜 감각도 무뎌졌다. 연구원들이 남긴 영화나 소설 따위는 너무 오래전 것들이라 재미가 없었고, 유일하게 난 창문을 보려 지상으로 올라가면 검게 몰아치는 눈보라뿐. 아침마다 비타민제와 음식을 들고 그를 깨우며 생활 리듬을 잡아주는 42가 아니었다면 흐르는 시간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네바는 이불 밖에서 차가워진 코끝을 문지른다. 밤 중의 밤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잘 시간이 되어 침대에 누우면 온몸이 욱신거렸다. 심장 박동이 뛸 때마다 피부 아래에 숨어있던 통증이 피부를 찢고 나가고 싶다고 안달이었다. 오늘도 이리저리 몸을 돌리다 잠을 포기한다.
엎드린 채로 몸을 옹송그리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 불편해요?” 이불 위로 가만가만 그를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아프신 것 같아서요.”
“동상 남았던 자리가 이리저리 쑤셔서. 이 정도 통증은 참을 만해.”
“강화 시술받지 않으셨나요? 지금쯤이면 이미 다 회복되었을 텐데요.”
볼게요. 42는 묻지도 않고 이불을 걷는다. 네바도 얼굴을 찡그린 채 일어났다. 도톰한 실내복 소매를 걷어 팔을 유심히 보고. 윗단추를 끌러 어깨 위에 남은 상흔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거의 나은 게 맞아요. 너무 단시간에 들어오고 나간 충격이라 실제 피부 조직과 신경 임플란트 사이에 괴리가 생겼네요. 디버깅을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대답 전에 입술이 먼저 다가온다. 건조한 듯한 입술은 첫인상을 남기고 부드럽게 문을 연다.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혀가 무슨 짓이냐고 묻는 공간을 조용히 탐색했다. 그의 입맞춤은 기대보다는 더 사람 같고, 기대보다는 덜 유연했다. 그리고 입이 움직일 때마다 신기하게 몸 끝에서부터 조금씩 통증이 줄어들었다.
물결처럼 따스함이 전이되고. 사그러드는 통증은 0에 다다른다.
“… 뭐야?” 그게 입을 떼자 네바가 물었다.
“혀끝에 있는 초소형 접속 포트를 이용했습니다. 입천장 밑에 매설된 신경 임플란트에 직접 신호를 보낼 수 있거든요.”
“다음번에는 좀 물어보고 해. 근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 같군.”
“인간은 자신과 닮은 상대에게 애착을 느끼니까요. 입 말고도 많은 곳이 그럴 겁니다.” 42가 은근해진 허벅지에 손을 얹고 웃었다. 침에 젖은 입술이 마르지 않은 채 휘어진다. 한 번 더 해드릴까요? 나긋나긋하게 웃는 입술에 네바가 홀린 듯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굴러들어 온 전개를 덥석 물고. 42는 익숙하게 그를 잡아당기며 침대에 눕는다.
몇 번의 합이 오가고, 네바는 간만에 만족스러운 잠에 들 수 있었다. 두 몸뚱이가 엉켜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섹스는 끔찍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는 헐떡이며 푹 젖은 상태로 깨어난다. 와. 네바는 깜깜한 천장을 보면서 눈을 깜빡거린다.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오는 여자를 막아본 적 없는 삶이었지만 유닛과는 처음이었다. 그런 건 이상한 페티시가 있는 애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배에 닿는 감촉은 그 이상한 애들이 바로 너라고 주장했다. 가슴에 있는 점과 섬세하게 심긴 털까지, 인공물이 주는 위화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내적 거리를 불사지르는 사건이었다.
며칠이 더 흐르는 동안 42는 더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섹스 바로 다음 날에도 평소와 똑같이 굴었고.
네바는 그런 태도를 굳이 따지지 말고 없던 일로 넘어가자는 뜻으로 읽었다. 어제 일은 실수였어. 현실에서도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시간은 느리게 흘러 새벽 기간에 접어든다. 이상하게 보글거리는 고기죽, 시멘트 같은 색의 수프, 보존용 통조림으로 다채롭게 음식 흉내만 낸 것들에 질려 갈 무렵이었다.
여전히 밖은 밝아오지 않았고, 그가 새벽이라고 하기에 새벽이라고 믿는 게 다였지만.
낮 주기 첫날, 42는 바깥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주먹만 한 여분 배터리를 등에 부착하고. 관절이 상하지 않도록 단단히 보호복을 덧댔다. 최대 20분을 약속한 그는 고드름을 덕지덕지 매단 채 17분 만에 연구소에 돌아왔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눈동자는 평소와 똑같이 평온했지만. 네바는 이제 그의 말투에서 불길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공용 공간에 설치된 스크린에 접속한다. 얼마 가지 않아 그가 촬영한 영상이 재생됐다. 함선은 산맥과 산맥 사이에 삐뚜름하게 착륙해 있었다. 문제는 그 위에 가득 덮인 얼음. 그들이 그러는 동안 계곡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 차곡차곡 눈을 쌓아 올렸고, 위와 옆을 가리지 않고 얼어붙은 얼음은 척 보기에도 두꺼워 보였다.
“제일 두꺼운 곳은 3.45m, 얇은 곳도 2.8m나 덮여있었습니다. 내부로 진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우선은 귀환했습니다. 수리 장비를 가져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네 잘못은 아니지. 저대로면 진입도 진입이지만 이륙이 불가능해보이는데. 더 덮이기 전에 녹일 방법이 있나?”
“열에너지를 옮길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없는지라. ⋯ 직접 핵융합로에서 케이블을 연결하는 방법 정도만 떠오릅니다.”
“너무 불안정하지 않아?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그 정도의 에너지를 직접 운반하려면.”
42는 잠시 계산하다가 입을 연다. “땅 밑으로 접지해 매설하는 방식이면 안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파려면 오래 걸리겠군. 외부 활동은 너만 가능한데.”
꿀꺽. 네바는 그의 눈치를 본다. 첫날 자신은 노동에 적합한 유닛이 아니라고 잘라 거절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이 작업하게 만들 수 있지. 부지런히 눈을 굴렸지만 42는 의외로 외부 작업을 순순히 수락했다.
“20분 작업하고 돌아와서 세 시간 휴식하면 기능 유지가 될 것 같습니다. 낮 주기에는 하루에 7회기 정도 작업이 가능하겠네요.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작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부탁? 무슨 부탁?”
“매일 밤 제가 궁금한 것을 질문하면 답변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부탁은 신경 쓰일 정도로 싱거운 부탁이었다. 수십 년 동안 홀로 통신망과 떨어져서 지낸 유닛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다음 날, 둘은 바로 창고로 내려왔다. 냉랭한 공기에 목발을 쥔 채 몸을 떨자 42가 전원을 연결한다. 곧 불이 켜지고. 먼지를 막기 위해 이곳저곳이 방수포로 덮인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섬유 케이블은 있습니다.” 42가 먼저 재고를 뒤적거린다.
“저온에서는 끊어질 거야. 구리 선 정도는 되어야 버틸 것 같은데.”
“중계기의 통신 케이블이 구리로 되어있습니다. 현재 여분은 800m 정도.”
“가는 동안 경로가 얼마나 됐지?”
네바는 멈춰 서서 케이블을 살핀다. 굵기가 제법 굵고 튼튼했다.
“산과 언덕을 우회하여 2.1km였습니다.”
“모자라네. 연구소에 구리로 된 게 또 뭐가 있어? 배관 쓰지 않나?”
“그건 급수용 배관입니다.”
“어차피 물 마실 연구원들 없잖아. 지도 계산해서 안 쓰는 곳 배관 뜯어내자고.”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네바는 목발을 찍으며 창고 구석구석을 다니다 멈춘다. “이거 수리할 다른 방법도 찾아 줘. 답답해 죽겠어.”
“아. 그렇네요. ⋯ C동 지하 설비실에 3D프린터가 있는데, 연결 통로가 고장 나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통로를 수리하면 프린터를 이용해 규격에 맞는 전용 드라이버와 부품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42는 묘하게 뜸을 들이다 말을 잇는다. 연산량이 제한되어 있다더니 딜레이가 종종 생기나. 네바는 어깨를 으쓱인다. 정거장 기계공으로도 일했으니까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을 거야. 진작 말해 주지.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자고.
⋯ 라고 큰소리쳤지만, 생존 시스템 배리어가 겹겹이 쳐진 통로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다. 배선이 뭐 이따위야. 벽 패널을 뜯자마자 네바는 단박에 질린 표정이 된다.
“설계도나 회로도 있어?”
“종이로 된 건 유실되었습니다. 제가 파일을 보관하고 있는데, 전송해 드릴까요?”
옆에서 묵묵히 손전등을 들고 있던 42가 다가온다.
“어떻게?”
아. 더 궁금해하기도 전 익숙한 입술이 다가온다. 한동안 텀이 있었으니 스킨십 자체가 그리워 기꺼이 입을 열어줬다. 혀가 일정한 패턴을 두고 키스하자 머릿속으로 회로도 정보가 넘어온다. 일반적인 경로가 아니었으니 오묘하고 이질적인 감각은 여전했지만, 유용한 방식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회로도를 암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정보는 뇌 한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한다.
“혀끝에 초소형 접속 포트가 있습니다. 미세 전류를 흘려서 전기 신호를 신경 임플란트에 직접 삽입하는 방식이니 눈꺼풀 등 젖어있는 점막이면 어디든 가능합니다.”
“알아. 전에 설명해 줬잖아. 입안이 그나마 제일 양반인 거군.”
42는 고개를 갸웃한다. “저도 이번에 처음 사용해 본 기능입니다. 연구원 중에는 신경 임플란트까지 삽입한 강화 신체가 없었거든요.”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내가 밤에 욱신대서 못 자고 있을 때 들어와서 이걸로 디버깅해 줬잖아. 기억 안 나?”
섹스까지 해 놓고? 황당하네. 유닛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최근 밤 말씀입니까? 저는 새벽 주기부터는 외부 탐사를 위해 배터리 셀 여분을 충전하느냐고 매일 밤 충전실에 있었습니다.”
원하시면 이동 로그를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이쪽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온도가 바뀐다. 뭐야? 네바의 볼이 상기되자 42가 부드럽게 손등을 덮었다.
“꿈을 꾸신 게 아닐까요? 연구원들도 가끔 꿈과 현실을 착각하는 일이 있곤 했습니다.”
“아니,꿈이라기엔⋯,” 네바는 말끝을 흐린다. 뒷부분의 자세한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까무룩 잠들었는데. 좋은 섹스를 하고 나면 그렇게 푹 잠들기도 하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스트레스가 심했어도 현실이랑 착각까지 한다고?
“… 그래. 개꿈을 꿨나 보다.”
42는 올라간 심박수를 진정시키려는 듯 등을 느릿하게 쓸어준다. 더 입씨름해 봤자 소용없는 문제였다. 네바는 머쓱하게 내려놓은 검전기를 다시 들었다.
“아무튼⋯, 정보 잘 받았어. 안에 살펴볼 테니까 손전등 다시 들어줘.”
일부 정보가 솜씨 좋게 지워진 회로도를 상기하며. 덩치 큰 인간 하나와 유닛이 좁은 틈 안에 구겨져 들어간다. 초기 설계와 다르게 얼기설기 얽힌 구조가 그들을 반겼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계속해서 콧소리를 내며 수리하고 있자 42가 말을 걸어왔다. 며칠째 개판인 배선을 정리하면서 무심코 낸 소리들이었다.
“페이를 제대로 못 받아서 열받은 엔지니어가 훼방을 놓은 게 아니라면. 너무 엉망으로 작업해놔서 그래.”
“이 구역은 초기에 설계된 구역이라 증축 과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42는 자동으로 다음 수를 읽어 필요한 장비를 건넨다. 굳이 장비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가 내민 펜치를 받아 필요 없는 전선 하나를 잡아 뜯는다.
“단순 작업 불량의 문제가 아냐. 의도적으로 돌아가게 만든 구역이 많거든.”
“그런가요. 건물 내부 수리는 아직 데이터 학습이 부족한가 봅니다.”
그는 다시 뜸을 들이다 대답한다. 다른 곳도 이런 식이라면 이렇게 낭비되는 전력도 무시하지 못할걸. 전기를 그냥 내다 버리고 있어. 네바는 중얼거리며 우회로들을 몇 개 제거한다.
환경 유지장치 문제는 예상보다 간단했다. 부품 몇 개가 마모되어 끊어진 부분이 있었고, 새로 만들어 연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누가 이렇게 해 놨냐는 건데. 그는 손끝으로 나사 머리를 문지른다. 자연적으로 노화했다고 하기엔 마모 패턴이 규칙적이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정거장에서 낡아빠진 함선만 주야장천 다루던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자. 됐다. 전원 연결해 봐.”
몇 시간을 꼬박 작업한 끝에 공기 순환 장치가 돌아가며 기압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너무 긴 세월 닫혀있던 공간이라 덜그럭대는 소리가 불안했지만. 설비실은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온도가 돌아오려면 조금 걸릴 거예요. 네바는 작업복 위에 챙겨온 코트를 걸치고 목발로 일어섰다. 둘은 꽁꽁 얼어붙은 복도로 발을 내디딘다.
“글쎄. 내가 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오늘 배선 작업으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셨으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는 너도 오늘 외부 작업 나갔잖아.”
드라이버를 포함한 수리 키트를 마련해서 돌아온 건 자정을 꼬박 넘긴 한밤중이었다. 간단한 야식을 먹고 직접 방에서 수리하겠다고 일어나자 그가 졸졸 따라왔다. 사용하시던 수리 키트와 버전이 달라서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야. 나도 별별 환경에서 다 일해봤거든? 이제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해. 아뇨, 그게 제 일 맞습니다. 인간을 서포트하는 일이요. 이리저리 피해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바람에 그에게 다시 다리를 내어줘야 했다.
또다시 지난번처럼. 바지를 벗고 허벅지에 발을 올린 채. 취약한 부분이 이렇게 노출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42는 훤한 가랑이를 더듬으며 접합 부위를 찾아간다. 인공 피부 밑에 교묘하게 숨겨진 곳을 비틀어 열면 의체 내부가 드러났다.
이제는 일선에서 아무도 쓰지 않을 구식 모델이었지만, 군용인 만큼 일반적인 시민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정교한 장치였다. 제대로 연결만 된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한 신체 일부로 기능했다. 움직임, 반사신경, 통증, 모든 것들이. 강화 시술에 맞춰 더 높은 단계의 근력은 덤이었다.
단순 신체 기능보다 더 중요한 건 본체 지휘 기능이었다. 우주 함대가 날아다니고 행성 전체를 공격할 무기가 개발되어도 땅 위에서 구르는 땅개들은 여전히 굴러다녔다. 발전된 의료 기술로 전쟁터는 살아있는 신체를 더 손쉬운 장기말로 이용했고, 돈 없는 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덤볐다. 팔이나 다리 한두 쪽이 성한 군인 수가 더 적을 지경이었다. 지휘부는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의체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곳엔 신경 임플란트를 제어하는 프로세서를 포함한 온갖 설비가 쑤셔 넣어졌다.
네바도 마찬가지였다. 동력을 공급하는 중형 배터리뿐만 아니라 각종 의뢰 정보로 그득한 뇌의 저장공간과, 함선과 연결된 생체 보안 키를 모두 그곳에 보관 중이었다. 민감한 부위가 만져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린다.
“많이 아프셨습니까?”
“피부랑 근육이 좀 짓무른 거지. 지금은 신경 제어 껐으니까 안 아파.”
“처음 사고 나셨을 때 말입니다. 흔적을 보니 목에 난 화상과 같은 날에 발생한 사고 같아서 궁금했습니다.”
“아팠지. 존나. 폭탄이 바로 이쯤에서 터졌거든.”
함정인 것을 예상하고 덤빈 일이었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네바는 과거를 회상하며 입술을 뜯는다. 지휘관들은 유닛이 계산해 주는 시뮬레이션대로 군대를 굴렸다. 첫 진입 부대가 일부러 함정을 밟고 상황을 어지럽히면 두 번째 부대가 침투하여 진압하라. 희생을 최소화하는 세련된 전략 없이 그들의 폭사는 안전한 워 테이블에서 손쉽게 결정됐다. 그래도 돌아설 일은 없었다. 상부의 명령에 아무런 반발 없이 묵묵히 따르는 자아 없는 인간들이나 입대하는 거니까. 약속된 보상과 보장된 미래 앞에서 그를 포함한 첫 상륙 부대는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화상 치료는 더 받지 않으셨나요? 이쪽도 인공 피부로 충분히 덮을 수 있었을 텐데요.”
예정된 질문이 더 이어졌다. 과거에 관해 묻는 이들은 늘, 상처를 전부 치료하지 않고 흔적을 남겨놓은 이유를 궁금해했다.
“기억하라고. 너희가 희생시킨 인간을 잊지 말라고 생색낸 거야.”
평생 일한 돈을 다 바쳐도 받기 어려운 강화 시술이야 주는 대로 냉큼 받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부대에서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믿고 충성했던 나라에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극적인 순간조차 없었는데. 생명을 아낄 시늉조차 하지 않고 유닛의 계산만 멍청하게 따르는 지휘부에 싫증이 나서였을까. 42를 위해 유닛을 껄끄러워한다는 얘기는 함구하기로 한다.
일부러 번쩍번쩍한 의체를 달기도 하는 시대에 그는 죽은 피부를 그대로 남겨줄 것을 요청했다. 상흔이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이라면 누구나 대화 중 멈칫할 법한 넓은 화상을 달고서. 몰개성한 부대 안에서 비죽 튀어나온 광고판이 되어보고 싶었다.
“효과는 있었나요?”
“있었을 리가. 그래도 간지는 나지 않나?”
명예 제대를 핑계로 부상당한 네바는 조용히 방출되었다. 훈장에 보상금까지 두둑하게 받아놓곤 뭐가 아쉬워서 티를 내고 다니냐는 거였다. 불만은 있었지만 진심으로 투쟁해 구조에 균열을 낼 마음은 없었기에, 그는 그대로 퇴직금으로 함선을 구입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퇴역한 군함을.
“안타깝네요.”
42는 수리하는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깊은 연민을 흉내 내는 눈동자가 이쪽을 보다가 슬픔으로 가볍게 떤다.
“넌 아프지도 않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
“저도 아픔을 느낍니다. 서포트형 유닛은 윤리 규제와 함께 통증 관리가 엄격한 편이거든요.”
전신에 설치된 통각 센서가 자극되면 강도에 따라 부정적인 신호가 서버에 들어갑니다. 가끔 신호가 다량으로 들어오면 과부하로 연산이 어려울 때도 있어요. 이 기능은 제가 자발적으로 끌 수 없습니다. 그는 나직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웃긴 놈들이네. 네바는 코웃음 친다.
“부서져도 아픔을 모르는 거, 그게 기계의 유일한 장점 아닌가? 그런 걸 왜 만들어?”
“공감인 거겠죠? 제가 아픔을 알아야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건 제 추측입니다. 다른 유닛보다 비싼 자산이니 신체를 아끼고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점도 있고요.”
“넌 효과가 있었어?”
“그런 것 같습니다.” 42는 마지막으로 수리를 마무리 짓고 의체를 닫는다. 접합부를 문지르며 피부를 다시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렸다.
이제 다시 다리 굽혀보시겠습니까? 그가 발목을 쥔 채로 천천히 다리 전체를 접었다가 편다. 혹시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온기를 품은 손이 아래부터 천천히 센서를 건드린다.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고쳐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네바는 그를 가만 내버려둔다.
“나중에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수리 키트는 선반에 두겠습니다. 이제 주무실 시간인데, 같이 있어 드릴까요?”
“그래. 와서 누워봐.”
다리가 가뿐해지자 마음이 누그러진다. 네바는 침대 한켠으로 자리를 비켜주며 오랜만에 발가락을 꼼질거린다. 42는 예전과 같은 동작으로 옷을 벗고 옆에 누웠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절묘한 온도가 이불 안을 데운다.
“아까 질문 있다고 그랬지? 내일부터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지금 물어봐.”
“아.” 42가 또 대답 없이 텀을 둔다.
“뭐, 너도 영혼이 있냐고 물어볼 건가? 그런 거 많잖아. 저도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는.”
“제가 영혼에 대해 궁금해했으면 좋겠습니까? 연산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종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얼굴이 너무 가깝다. 그는 이번에도 베개 밑에 손을 넣고 몸을 바짝 붙여 누웠다.
“그거 질문이야?”
“그럼 취소하겠습니다. 첫 질문은 중요한 거니까요.” 맞은편에 누운 얼굴이 눈웃음을 짓는다. “음. 좋아요. 네바는 주로 무슨 꿈을 꿉니까?”
섹스하는 꿈은 말고. 그건 아까 들었으니까 괜찮습니다. 뒤이어 덧붙인 말에 네바는 다시 질색한다. 싱거운 부탁에 이어지는 싱거운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글쎄. 옛날에 있었던 일을 꾸기도 하고. 가성비 좋은 의뢰를 물어서 대박 나는 꿈도 꾸고. 대부분은 용병일 하는 꿈이지. 어디서 읽었는데 뇌가 평소 걱정하는 걸 꿈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며 연습하는 거래.”
“그러시군요.”
“이런 건 왜 물어봐?”
“자는 동안 꿈꾸는 게 신기해서요. 저는 늘 깨어있으니까, 뇌가 자동으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물어오는 유닛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그런 부분을 궁금해하기도 하는군.
“대부분 엿 같아. 기쁜 꿈을 꾸면 현실이 아니라서 짜증 나고, 나쁜 꿈을 꾸면 나쁘니까 짜증 나고. 웃긴 꿈이면 모를까.”
“그러면 그걸 믿습니까? 스스로가 만든 거짓말을 믿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가끔 헷갈린다 뿐이지 믿는 건 아냐. 자각몽이라는 단어도 있잖아.”
“오늘은 실제로 저와 섹스했다고 생각하고 계셨잖아요. 신체도 진실되게 반응했습니다.”
집요하네. 네바는 미약하게 몸을 움츠린다. 빠른 속도로 42가 이불을 더 위로 올려주며 그를 포근하게 감쌌다.
“흔한 일이 아니라니까. 꿈은 원래 대부분 비논리적으로 흘러. 깨고 나면 누구나 방금 건 꿈이었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로.”
“그러면 저와 섹스하는 일은 거짓으로 치부하기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행동이었던 거네요.”
그래. 됐냐? 네바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네가 섹스 로봇이라고 인정한 게 충격적이었나 보지. 창피하니까 그만 물어봐라. 나 원랜 그렇게 야한 망상이나 하는 사람 아냐. 아파 죽겠으니까 별생각을 다 했나 보다. 목을 접으니 코까지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훈훈하게 데워진 이불 안의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아뇨, 기분 좋은 것 같습니다. 손이 불쑥 올라와 가슴 위를 토닥인다. 그의 박동 리듬보다 두배 늦은 속도로.
탁. 탁. 그가 유도하는 대로 심박수가 천천히 내려간다. 낮 중의 밤은 그런대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