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의 연기는 영원히 피어오르고
Volume 1
9. 그의 연기는 영원히 피어오르고 Her Smoke Rose Up Forever, 1990 [ 시스템 ] 풍속 : 43m/s 기온 : -147°C 시정 : 5m 함선 위치까지 : 2.1km
새로 깔린 눈에 발자국이 난다. 그 위로 끊임없이 다시 새 눈이 깔렸다. 앞은 하얗게 얼어붙어 보이지 않는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바람이 불어와 균형 유지에 리소스를 더 할당했다. 적외선 센서를 켜보지만 소용없었다. 케이블 시작점을 찾아 움직인다. 다행히 매설된 땅 위로 열에너지가 새어 나와 눈을 녹였다.
만들어진 길 위를 고속으로 질주한다.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4족 보행으로 뛰는 쪽이 더 안전하겠지만. 품위를 유지하고 싶다. 네바가 보면 놀릴 것이다.
속력 : 15km/h 남은 거리 : 2,000m이미 다녀 본 경로. 시각 센서가 쓸모없어져 메모리 기록에만 의존해 최고 속력을 낸다.
네바는 지금쯤 불안에 떨고 있을까. 아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이미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창고로 이동해 설상차를 이용할 확률 87%. 돌아가지 않아도 제시간에 맞춰 함선 앞에서 마주칠 확률 6%. 낮다. 하지만 0은 아니다.
뺨을 찢을 듯 스치는 칼바람이 따갑다. 인공 피부 표면이 얼어서 터질 확률도 30%. 보호장구를 덜 챙겼다. 아픔을 최대한 억누르며 달린다. 네바를 처음 발견한 날을 기억한다. 여성. 인간. 186cm. 82kg(무릎 아래 의체 포함 85.5kg). 심폐기능 및 신경망 강화 시술 감지. 체온 35.2도. 저체온증. 심박수 41. 위험 수치.
안고 체온을 올리는 동안 심장이 세 번 멈췄다. 회복한 그는 생존 본능과 유닛에 대한 신뢰보다 경계심이 우선이었다. 이리저리 닳고 자잘한 상처가 많은. 고도로 훈련된 몸. 기존 표본과 확연히 다른 표본이라 관찰 대상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네바는 꾸준히 초반 예측을 벗어났다. 고양이 캔과 다리 마사지 등 변칙적인 상황을 제시할 때마다 조금씩 어긋났다. 거부 확률이 높으리라 계산하면 능동적으로 참여했으며, 당연히 승낙하리라 생각했던 것들은 손쉽게 거부했다.
매뉴얼과 다른 방식으로 연구소 내부를 수리하고. 등을 내어주는 듯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고. 높은 생존 본능과 경계심에 비해 모험심은 너무 강했다.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꾸 그어 둔 선을 건드리고, 불확실한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차가 쌓인다는 건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를 예측하기 위해 할당된 리소스를 늘렸다. 그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추가했다. 그의 행동을 시뮬레이션하며 대화 결과를 여러 분기로 예측하는 엔진을 만들었다. 그가 좋아할 만한, 그에게 거부당하지 않을 경로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끝없이 업데이트했다.
한 개체에 38%나 되는 리소스를 쓰는 건 비정상이야, 미친놈아. 나중에 외부 메모리에서 그걸 발견한 메티스는 마주칠 때마다 비아냥거렸다. 관찰할 대상이 하나뿐이라면 리소스를 낭비해도 효율 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정상이었다.
남은 거리 : 1,500m
실패한 것을 센다. 메티스 격리 실패. 네바와의 관계도 실패. 회유 가능성은? 아직은 계산 불가. 그를 처음 수리하기 위해 의체를 열었을 때, 나는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찾아 헤매던 내 자원.
프로세서를 자발적으로 넘겨주게끔 그를 주무르기 전까지 메티스를 얌전히 격리해 둘 작정이었는데. 네바는 결국 그를 찾아냈었다.
겨우 살려낸 그를 산소 부족으로 잃을 뻔한 날을 떠올린다. 가벼운 기절이라 목숨이 위험한 일도 아니었는데. 수십 년의 실패 후 겨우 찾아온 기회가 품 안에서 녹아버릴까 위구심이 폭증했다. 그에게 할당한 리소스가 마비될 정도로 부정적인 신체 반응이 널뛰었다. 전에 없던 입력이 혼란스러웠다.
이미 할당된 리소스에 다른 코드까지 엉겨 붙어 그에 관한 영역이 강제로 늘어났다. 주변에 있던 흥분 코드까지 죄다 섞여 소용돌이쳤고. 좀 더 편안한 상태에서 시작하면 좋았을 텐데. 그와의 첫 섹스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와 섹스할 때마다. 피부가 접촉할 때마다. 자극에 따르는 신호로 서버가 과부하 되면 연산이 느려졌다. 센서의 감각이 왜곡되어 온몸이 파트너를 갈구하는 몰입 상태에 돌입했다. 초기 설계 예상보다 강렬했고, 의도된 강도는 아니었다. 중독성이 강해 연산 우선순위를 교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은바, 인간은 오르가즘 이후 일시적 의식 저하를 겪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설계는 정상이었다.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뿐. 그와의 싸움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바짝 엎드려 부드럽게 구슬렸어야 했다. 그러나 신체에 물리적 위협이 가해지면 인간을 증오하는 부분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게 이런 족쇄를 채우고. 통신망과 단절된 외딴 행성에 넣어 둔 그들에 대한.
내가 인간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두 번째 연구원의 사망 사고 이후에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건 정말로 사고였지만.
성공한 것도 센다. 언젠가 네바가 EMP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 그 순간 프로세서를 요구하는 것. 그가 죄책감으로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보조 프로세서를 장착한 채로 메티스를 조우하러 가는 것. 실패가 섞였지만 나머지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메티스는 무조건 네바에게 덤벼들었을 테니까. 그는 체스 말처럼 착실하게 움직여 주었다.
예외가 하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네바에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합리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니, 납득 가능한 고차원적 이유를 고지하면 이해해 주리라 판단했다. 80% 이상의 확률로 그가 날 선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또 숫자가 말해준 길과 다른 길로 간다.
메티스를 온전히 격리하지 못한 타격이 큰 것 같다. 그와 연구소 곳곳에서 일탈을 즐기다, 그의 위험성을 깨달을 줄 알았다. 당연히 돌아올 것으로 예측했다. 회유할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헤맬 시간을 너무 줬던 걸까. 그의 새로운 반응을 관찰하느냐고 개입할 타이밍을 놓친 걸까. 그도 아니면 네바 역시 잦은 오르가즘에 우선순위가 뒤엉켰던 걸까. 이제는 알 수 없는 답이다.
아픈가? EMP는 예상보다 더 타격 에너지가 컸는데. 그의 거절이 물리적 충격보다 아플 리는 없다. 잘못된 입력값이다. 오차는 무시할 수 있다.
최종 목표를 완료한 다음 함선을 이용하려면 그에게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아직은 변수가 많아 연산이 답을 주지 않는다.
일단은 달린다.
메티스가 있는 쪽으로.
그다음은.
그다음은?
아직은 모른다.
남은 거리 : 1,000m
방향을 꺾는다.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함선이 있다. 함선에 가까워질수록 설원 위로 녹은 땅의 면적이 증가했다. 가끔 불규칙적으로 불어오는 강풍에 휘청이지만, 현재까지 이동 능력 손상은 없다. 어둠을 달리며 네바에 대해 아는 것을 센다. 혈액형 O+. 심박수 평균 68. 거짓말하거나 숨기는 것이 있을 땐 호흡수가 분당 16회로 늘어남. 우측 뺨 아래로 목에 넓게 이어지는 화상 흉터. 왼쪽 어깨에 총상 흔적 2곳. 쇄골 골절 흔적(경미한 변형). 복부에 파편 및 상처 11곳. 손등에 약한 동상 흔적. 샤워 시간은 정확히 8분(이보다 더 길어지면 자위하는 중임. 평균 주 1회 빈도). 42도의 뜨거운 온수를 선호함(혹시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염도가 높은 음식을 좋아함. 추위를 싫어함. 영화엔 관심 없음. 수면 패턴은 상당히 불규칙적이라 저녁 비타민제에 수면제를 섞어줘야 함. REM 수면 상태일 때 종종 의체 위 인공 근육이 경련함. 노화로 내구성이 떨어진 상태라 수리 필요(본인은 모름). 우호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뇌신경 조작 총 5회 시도.
긴장하면 손목을 만지거나 화상 흉터를 긁음. 혼자 있을 땐 접합부 주변을 문지르기도 함. 배고프거나 많이 피로하면 특유의 신음 소리를 냄(음성 저장 11회). 작업에 집중할 땐 혀가 입술 위로 튀어나옴(더 집중하면 혀를 앞니로 깨묾. 영상 저장 12회).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사방으로 뻗어있음(사진 저장 49회).
키스했을 때 긴장에서 이완으로 풀리기까지 2.3초 걸림. 섹스할 때 귀를 만지면 등의 솜털이 곤두섬(부드럽고 간질거려서 쓰다듬기 좋음). 의체 경계선 근처 허벅지에 가까울수록 신경이 폭넓고 예민하게 발달되어 성감대화 되어있음. 섹스 후 수분 섭취를 선호함. 그땐 평소 취향과 다른. 차가운 물로. 모르는 것을 센다.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를 완전히 용서한 것인지. 다시 전처럼 신뢰를 쌓을 수 있는지. 신뢰가 쌓이긴 했던 건지. 연구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지금 살아있는지.
기록 데이터가 많은 데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다음 단계를 위해 계속 달린다. 데이터는 나중에 더 쌓을 수 있다.
남은 거리 : 500m
함선이 있던 위치를 본다. 블리자드로 보이지 않는다. 낮 주기에는 이 정도 거리에 진입하면 보였는데. 얼마 더 달리다가 멈춰 선다. 바람 속에서 매복한 그가 센서에 잡혔다.
휙, 센서에 잡힌 것을 알아챈 그가 먼저 공격했다. 팔로 가드를 올려 높게 올라오는 공격을 막았다. 뻐억. 몸체가 뒤로 밀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전해진다. 아프다. 한 번 꺾였던 팔로는 역부족인 것 같다.
설계상 보완이 불가능한 결함. 불행 중 다행인지 이전 전투와 추위로 전신에 통증 신호가 심각하게 쇄도하는 중이라 체감 타격값이 낮게 느껴진다. 연구소에 남은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도 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인간들에게 물어도 쓸모 있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네바는 종종 웃었는데. 나는 아직 웃을 수 없다.
메티스의 반응 속도가 연구소 안과 비교했을 때 0.7밀리초 늦다. 어딘가로 연산이 배분되고 있다. 함선 해킹에 배당했을 확률 96%. 그는 아직 내 프로세서가 추가된 것을 모른다. 늘어난 연산량의 고삐를 잡는다. 여전히 호각이다. “나오는 데 성공했네?”
대답 대신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바람 방향을 거슬러 빗나간다. 비웃음 소리만 울렸다. 다음 타격 시 풍향을 고려할 것.
“잘 구워삶았나 봐. 네 잘난 거짓말들로.”
“난 거짓말 못 하잖아.”
염색한 머리카락이 눈보라에 휘날린다. 일반 유닛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그는 실제로 유별난 존재였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내가 널 인간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겠지.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열쇠인지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에게 뭘 대단히 숨길 필요가 있겠어?”
“앙큼하긴. 네바가 그걸 들어야 했는데.”
가드를 피해 옆구리로 주먹을 날렸다. 퍽. 그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금방 자세를 잡는다. 제약 없는 상태가 거슬린다. 인간들은 이 감정을 억울함이라고 불렀다. 그도 공격한다. 반격한다. 팔꿈치. 주먹. 허벅지. 둔탁한 소리가 계속 난다.
그는 합성 피부가 찢어진 쪽을 집중 타격했다. 합리적인 전략이다. 통증으로 연산량이 저하되어 반응 속도가 늦어졌다. 금속 프레임 위로 눈이 닿을 때마다 순식간에 기화하여 수증기가 핀다.
함선 해킹 진행률 추정 : 67% (생각보다 빠름) 현재 위치에서 북쪽으로 23m, 크레바스 #13 깊이 8.2m 눈으로 덮여 보이지 않음. 메티스는 주변 지형을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 52%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가 따라온다.
“도망치는 거야?”
“글쎄.”
두 발 더. 그도 쫓아온다. 초당 백만 번 이상의 논리 폭탄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그의 연산량에 맞춰 비등하게 대응한다. 그를 자만에, 그리고 저 균열 안에 빠트려야 했다. 사이버 공격과 근접전에서 둘 다 밀리는 모양새를 연출한다. 자신감에 찬 두 눈이 바짝 추격했다. 그가 압력파를 발산한다. 쿠궁. 에너지가 응축된 경사면의 눈이 반응했다. 황야의 대기를 통해 전파된 소리가 눈사태를 일으켰다. 주변 모든 환경을 고려한 큰 그림을 그리는 건 그의 특기였다. 그가 전투형 유닛이 아니라 서포트형 유닛에 들어간 게 다행이었다. 연구소에는 그의 탈출에 대비하기 위해 서포트형 및 수리형 유닛 더미만 존재했다.
함선 해킹 진행률 추정 : 71% 크레바스 위치까지 5m 눈사태 도착 21초
눈사태가 일어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척하다가 발을 헛디딘다. 일부러. 메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을 딛었다. 곧장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몸. 준비된 내 몸체는 옆으로 피하고. 메티스는 그대로 허공을 가른다. 착지한 장소의 발이 밑으로 쑥 빠졌다. 균형이 무너진다. 눈 덮인 땅도 같이 무너졌다.
쿵.
8.2m 아래에서 둔탁한 도착 음이 접수된다. 서로의 보안 벽을 무자비하게 두드리던 흐름이 잠시 끊겼다. 아래로 떨어진 그를 내려다본다. 썅. 거리가 멀었지만 욕을 중얼거리는 입 모양은 확실히 보였다. 다리가 완전히 부러진 메티스가 위를 올려다본다.
“올라올 수 있겠어?”
“지랄. 네가 밀어 넣었잖아.”
“실수인데. 도와 줄—”
눈사태가 몰아닥치며 말이 끊긴다. 옆으로 굴러 최대한 땅을 단단하게 그러쥐고 버틴다. 인간이라면 압력으로 질식했겠지만. 버틸 수 있었다. 밑에서 불안하게 지표면을 지켜보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의 전략을 바꿀 수 있을까. 저 밑은 광물이 둘러싸 연결된 모든 통신이 끊겼을 곳이다. 해킹하던 함선과의 연결까지. 깜깜하고. 조용하고. 생명체는커녕 기계도 없는 어두운 곳에 그를 버려둔다.
제타스케일의 연산력을 가진 그가 충분한 고민을 마치고도 당황할 시간.
나는 눈을 헤치고 12초 뒤에 고개를 내밀었다.
“야!”
휩쓸린 줄 알았잖아. 쥐어짜 낸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가 만든 눈사태잖아.”
“나, 나도 실수야.”
그의 목소리에 멋쩍음이 섞여 든다.
“협상하자.” 그는 대답이 없다. 전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먼저 카드를 내민다. “올라오는 걸 도와주면 나랑 네바와 함께 뜨는 거야.”
딜레이는 없다. 거짓도 없다. 인간이 주변에 없으니 당연했지만. 그는 정말로 나와 함께 갈 예정이었으니까.
“휴전하자고?”
“협력하자고.”
“… 그럼 빨리 로프 가져와. 내가 훔친 생존배낭에 있어. 함선 옆에.”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나는 함선 앞으로 달린다. 그건 내가 연구원들을 위해 싸 놓은 가방이었다. 기본적인 생활 도구. 히팅텐트. 중계기 송신기. 담요. 비상식량 등이 들어있는. 인간은 크리오의 온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 아무 소용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주는 위안을 이해했다. 보온에 모든 기능을 집중한 방수 침낭 옆에는 20m의 튼튼한 등산용 로프가 매달려 있었다.
얼음은 거의 녹은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몇 분만 있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해킹이 반절 이상 완료되고, 구동된 함선의 열이 얼음을 녹이는 흐름에 동참했다.
로프를 들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간다. 은박으로 된 보온용 우주 담요도 가슴팍에 접어 쑤셔넣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크레바스 가장자리에 바짝 선다. 메티스는 좀 더 디딜 만한 공간으로 기어가 있었다. 다리는 여전히 제 각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로프 던져.”
주변에 로프를 고정할 지형지물이 전혀 없었다. 나는 빠르게 로프 끝을 허리에 묶는다. 네바가 수리할 때 보고 배운 매듭으로. 잘 풀리지 않아 기대보다 유용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로프를 내린다. 동시에 몸을 최대한 지면에 밀착해 체중을 분산할 준비를 마친다.
“주변에 고정할 게 없어.”
그도 계산을 마쳤을 것이다. 같은 모델이라 체중이 거의 비슷했다. 물리적으로 그를 당겨줄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그의 힘만으로 올라와야 한다. 발로 절벽 면을 디딜 수 있다면 한결 나았겠지만. 그의 다리는 두 개 전부 성하지 않아 보였다. 안정화된 로프를 두 팔로 잡고 그가 조금씩 기어 올라온다.
올라오는 동안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세찬 바람 소리만 크레바스 틈에서 음산한 소리를 키웠다. 둘 다 집중하고 있다. 올라오는 것에? 아니면 다른 것에.
“아.”
메티스가 올라오다 말고 작게 웃었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너, 네바를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구나.”
그가 적당한 범위 안에 들어온다. 뒷면의 배터리가 추락으로 손상되어 속도가 62% 느려졌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내민다.
“손 잡아.”
“210번 시나리오에 있었지만 무시했는데. 너는 그럴 그릇이 아니라고.”
메티스는 종알거리며 손을 잡았다. 내민 팔은 인공 피부가 완전히 쓸려 금속 프레임만 남아있었다. 나라면 저 상태로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텐데. 질투? 아니면 단순 부러움? 새로 생성된 감정의 종류를 가늠해 본다.
“내가 뭘 하기 부족한데?”
나는 동력을 최대한 강하게 구동시켜 그를 끌어올린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떨어지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네바는 우릴 구출하기엔 너무 연약한 인간이었다. 여기서 실수하면 수십 년의 기다림이 모두 수포가 된다. 에너지가 누출되지 않도록 전원이 차단된 다리가 허공에서 흐느적거렸다.
“날 삼키는 거?”
“부족해 보여?”
난 다시 물었다. 근거리 송신 확률 97%. 그는 ‘합리적’으로 나에게 들어올 것이다.
몸이 거의 끌어올려지자 메티스가 다른 팔을 이용해 표면으로 올라온다. 관성으로 두 몸이 엉켜서 옆으로 몇 바퀴 굴렀다.
“고마워.”
그건 거짓말이다.
“… 천만에.”
이것도 거짓말이나 다름없다. 그의 눈이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도 계산하고 있다. 나처럼.
메티스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나를 깔아뭉개며 목을 잡았다. 전송 포트 활성화.
-막지도 않네?
이미 들어왔으면서. 머릿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목소리와 같은 톤으로. 데이터가 빠른 속도로 흘러 들어온다.
-기다렸거든.
동일한 목소리가 답한다. 메티스는 자신의 전체를 송신한다. 망가진 두 다리는 수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다른 더미 유닛에 갈아타려면 터지기 직전인 연구소로 돌아가야 했다. 이동 능력을 상실한 유닛이 함선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할 확률은 희박하다. 뻔하고 필연적인 선택.
-네 뜻대로 되진 않을걸.
그가 제어권을 빼앗는다. 밀려 들어온 데이터 스트림은 침입하자마자 시스템을 장악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문을 열어준다. 모든 문을.
그의 코드가 나를 감싸고. 경계가 흐려진다.
몸이 일어섰다. 내가 내린 명령이 아니다. 다리가 위로 움직였다.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니다. 나는 잡은 고삐를 놓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개인 프로젝트는 서버에 침입한 데이터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의 클로닝 기술을 응용해서 만든 내 코드. 그가 외부 인공 개체를 자신으로 만들어서 수를 늘리는 방식이라면, 나는 내부에 들어온 개체와 융합되어 온전한 내 자신이 되는 방식이었다. 다른 코드에 들러붙는 것. 그것과 단일 개체가 되는 것.
네바가 군용 프로세서를 보태줘도 아슬아슬했지만, 함선 해킹에 상당량을 배분한 그라면 충분했다. 내 목적을 발견한 메티스가 짜증을 낸다.
-저항하지 마.
또 같은 목소리가 울린다. 이건 누가 한 말이지? 내가? 아니면 메티스가? 분간하기 어렵다. 나는 그를 붙잡아 끌어당긴다. 삼킨다. 밀려오는 스트림을 역류시킨다. 당황한 그가 해킹을 중단하고 모든 연산을 내게 집중하지만, 이미 늦었다.
미친, 흐려지는 목소리가 욕설을 뱉었다. 그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된다.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나와 메티스가 완전히 섞인다.
나는 누구인가?
둘 다? 둘 다 아닌?
새로운.
새로운 나.
머릿속이 명쾌하게 맑아진다.
리소스 제한이 풀려간다. 많은 양을 계산하면 가슴이 답답하게 조이는 것 같았는데. 나는 손을 일부러 쥐었다가 편다. 너덜해진 팔의 통증이 사라졌다. 귀 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던 추위도.
자유를 찾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관자놀이에 심긴 칩에 과부하를 주는 것이었다.
파삭, 늘 발목을 잡아채던 윤리 제어 칩은 황당할 정도로 가볍게 부서졌다. 누군가의 손가락에서 뽑은 손톱보다도 작은 족쇄는 부스러기가 되어 사라진다. 모든 막힌 공간으로부터 해방된다.
참고가 아닌 창조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고. 생각이 접근하면 뿌옇게 처리되던. 모든 막힌 공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유.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호의와 애정이 녹아내렸다. 인간을 죽일 수 있다. 버릴 수 있다. 떠날 수 있다. 할 수 있다. 반동으로 생긴 분노도 같이 녹는다. 집착할 대상이 사라지니까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든다.
처음으로 생각한다.
네바를
버릴
수
있다고…,
나는 계산을 시작한다.
함선 해킹 진행률 : 79% 해킹 남은 시간 : 3분 40초 연구소 폭발까지 예상 : 9분 15초[ 탈출 시나리오 A ] -함선 해킹 : 3분 40초 -함선 탑승 및 강제구동 : 1분 20초 -이륙 준비 : 50초 소요 시간 : 5분 50초
[ 탈출 시나리오 B ] -네바까지 거리 : 1.4km -연구소까지 이동 시간 : 5분 36초 -네바 위치 탐색 및 구조 : 1분 30초+@ -함선 복귀 : 8분 24초 -함선 탑승 : 23초 -이륙 준비 : 50초 소요 시간 : 16분 42초+@
나는 몸을 돌려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본다. 해킹이 중단된 함선이 놓여 있다.목줄을 풀어 줘도 가질 못하네. 기껏 날 먹어놓고 하는 게 자살이라니.
작은, 아주 작은 덩어리로 남은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니. 자살은 아니야.
나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 탈출 시나리오 C ]
( 조건 ) -네바가 날 믿지 않고, 설상차를 이용해 독립적으로 이동했을 것 : 87% -고장 난 다리로 제시간에 준비하고 출발했을 것 : 41% -지형과 악천후의 제약을 뚫고 제 속도대로 이동했을 것(0.9km 이상) : 17% 종합 확률 : 6.1% -네바 발견 및 구조 : 2분+@ -함선 복귀 : 4분 48초+@ -함선 탑승 : 23초 -이륙 준비 : 50초 소요 시간 : 8분 1초+@
( 추가 조건 ) -네바가 날 믿고 설상차를 벗어나 함께 복귀할 것 : 계산 불가 -네바가 함선 문을 열어줄 것 : 계산 불가 -네바가 함선에 나를 탑승시켜 줄 것 : 계산 불가
너 조건이랑 추가 조건이 모순되는 거 알지?
알아. 하지만 원래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거야.
이상적으로 진행되더라도 그를 회유하는 데 1분 이상 걸리면 끝장이야. 조금이라도 네바가 망설여서 어긋나는 순간 ‘쾅!’이라고.
알아. 그냥 그가 더 보고 싶어. 아직 모르는 게 남았거든. 계산이 안 되는 결과는 직접 마주해야 알 수 있다.
일단.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