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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런 벽지

Volume 1

•DJG•14 min read



3. 누런 벽지 The Yellow Wallpaper, 1892



day 16.

이동이 편해지자 네바는 다시 연구소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수리 및 보수 장비를 보관해 둔 창고 위치도 알았겠다, 부품 프린터기도 있겠다, 그에게도 명확하게 할 일이 생긴 덕분이었다. 그는 낮 동안 제일 먼저 음식 재조합기부터 고쳤다. 42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더는 기묘한 색의 보존 음식을 꼴도 보기 싫었다.

그가 구리 선을 마저 만드는 동안 42는 케이블 매설 전 체크포인트가 되어줄 노드를 설치하기로 했다. 경로에 200미터 간격으로 히팅 텐트와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 안전성을 확보하자고. 42가 혼자 작업하다가 시간을 놓치거나 갑작스러운 블리자드로 복귀가 어려울 때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전 내장 타이머가 있어서 놓치지 않고 작업을 마칠 수 있습니다. 자원 절감과 효율 면에서 낭비가 큽니다.

-아니. 그래도 안전이 우선이야.

거절하고 작업 효율을 높이려는 42를 한사코 설득해서 얻어낸 노드였다.





day 18.

그가 나가 있는 동안 네바는 계속 연구소 지도를 들여다봤다. 지난번처럼 낭비되는 전력을 잡는다면 환경 유지 시스템도 충분히 재배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누군가가 우회하거나 망가뜨린 지점을 곳곳에서 찾았다. 오늘 가볼 곳은 A동의 전력이 완전히 차단된, 보이지 않는 구역이었다.

“이쪽은 뭐 하는 곳이야?”

“… 유닛 기능을 테스트하는 실험실입니다.” 42는 주저하다가 대답한다. 인공존재협약은 인간에게 물리적 해를 입히는 것과 더불어 거짓말도 금하고 있다. 기밀을 피해 선택적으로 정보를 빠뜨리기 위해 답변 중 딜레이가 생기는 것 같았다. 네바는 모든 공간을 가리키며 물었고, 일부러 그의 저항값이 가장 큰 곳을 고른다.

“여긴 서모스탯이 고장 나서 온도 관리가 되지 않는 구역입니다. 전부 얼어붙어서 유용한 물건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가 판단하지.”

네바는 설계 도면을 따라 천장 패널을 뜯는다. 드러난 안쪽은 죄다 젖어있었다.

“물이 잔뜩 샜군.”

“급수기가 얼었다가 터졌습니다.”

“언제? 몇 년은 된 것 같네.”

이리저리 부식된 배선은 상태가 안 좋았다. 단순한 부품들이라 복구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4년 9개월 전에요.”

“고칠 생각은 안 했어?”

“…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온도 조절 장치가 없어도 이동에 문제가 없으니까요.”

“사용하지 않아도 고쳐뒀어야지. 이렇게 젖어 있으면 부식되는 거 알잖아. 죄다 못 쓰게 됐네. 이건 새 기판 넣어야 해.”

“참고하겠습니다. ⋯ 수리용 기판 여분은 없으니 다른 수리 가능 영역을 살펴보는 게—”

“하나 만들면 돼. 그 프린터기로 기판 인쇄하고, 다른 전자기기는 어디서 내가 적당히 뜯어올게.”

42는 예상대로 졸졸 설비실로 따라왔다. 첫 날엔 그냥 내버려두더니, 이제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네? 너는 할 일 안해? 키득거리며 묻자 그는 자신의 우선순위 임무는 인간 보조라는 예의 대답을 다시 반복했다.





day 19.

“이거 스캔해서 프린터기에 넣어줄 수 있지?”

네바는 오전 동안 스케치한 회로도를 그에게 건넨다. 뒤틀린 것들이 많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게 훨씬 편했다. 전송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내기가 무섭게 프린터기에 전원이 들어왔다. 유리 섬유에 회로도가 느리게 인쇄되는 동안 네바는 창고를 돌며 재료를 모은다.

“마지막으로…, 레진은 이거면 되겠다.”

“그건 치아용 레진입니다.”

“알아. 절연체면 그만이니까 상관없어.”

인쇄까지 시간이 약간 남는다. 42는 그동안 따뜻하게 합성 카페인 액을 만들어왔다. 보온 머그잔에 담긴 합성 카페인을 마시자 정신이 반짝 든다.

“구경해도 괜찮겠습니까?” 42는 끈질기게 따라와 테이블 옆에 앉았다.

“뭘?”

“설계도나 매뉴얼 없이 무언가를 계속 창작하시는 게 흥미로워서 그렇습니다. 저는 기체에 내장된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 만드는 것만 가능하거든요. 응용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허용됩니다.”

“다 경험이지. 나도 나름 머릿속에 설계도가 있는 거라고.”

온 김에 여기 돋보기 잡아 줘. 고정이 잘 안돼. 네바는 고개 숙인 확대경을 건넨다. 42가 스템을 붙잡고, 네바는 묵묵히 납땜을 수행했다. 집중한 속눈썹은 깜빡이지도 않고 묵묵히 아래만 봤다.



“손이 많이 떨립니다.”

지켜보던 42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추워서 그래.”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42는 일어나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양옆으로 팔이 올라오고 두 손이 손등을 감쌌다. “제 손은 안 떨리니까 위에서 잡아드리겠습니다.”

“그게 되겠⋯, 오.”

“미세하게 반대 압력을 줘서 떨림을 감쇠하는 겁니다.”

이게 되네. 네바는 큼직한 손바닥을 위에 얹은 채 인두를 움직인다.

“손이 꽤 크군.”

180정도 넘었을까, 42는 그보다 체구가 작았지만 손은 훨씬 더 컸다. 손등을 다 덮고도 남는 기계손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많은 일을 수행하는 부위라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에 내장된 것들이 많거든요.”

이렇게 있으니 꼭 <사랑과 영혼> 놀이하는 것 같습니다. 나 그런 고전 지구 영화에 관심 없어서 뭔 얘긴지 몰라. 하지만 고전 영화인 건 아시는 거잖아요? 상식이라고 하자. 두런두런 대화를 잇는 동안 뒤늦게 온도가 오른다.

“너 지금 온도 올린 거야?”

“따뜻한 거 좋아하시니까요.”

“그래. 저기도 기판 완성하고 고쳐놓으면 따뜻해질 거야.”

알겠습니다. 42는 은근슬쩍 제 턱을 어깨에 묻었다. 얼굴도 역시. 그의 손처럼 닿을 듯 말 듯 하게.





day 20.

복구한 실험실엔 기록물이 많았다. 단순히 테스트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록저장소에 가까워 보였다. 실험 기록을 포함한 다른 관측 결과나 각종 로그가 가득 정리되어 있었다.

앞에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척하다가 42가 외부 작업을 나갔을 때만 잠시 들어와 살핀다. 굵직한 로그들은 대부분 소행성 추돌 직후에 남겨진 것들이었다. 마지막 보급선이 도착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 퍼벙—. 최후 통신 사이사이 42의 이동 로그는 말끔하게 삭제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데이터는 나도 스마트 패널을 연결해서 계산해 봐야 알 것 같은데. 수상한 점이 계속 발견되었으나 방대한 기록물을 일일이 살펴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데이터 전송 방법을 더 궁리해 보자. 밤에 혼자 보거나, 패널에게 분석 맡기거나 해야지. 네바는 전략적 후퇴를 택한다.





day 23.

“여기 창고 아래 지워진 부분은 뭐야? 설계적으로 비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며칠 뒤. 네바는 다른 공간을 더 탐색한다. 재조합기로 만든 채소볶음을 거하게 먹고 나서였다. 음식 재조합기를 고치면 먹고 싶은 음식이 뭔지 밤새 고민했지만 뾰족하게 떠오르는 음식이 없었다. 그저 푸성귀. 질퍽한 단백질 덩어리가 아닌, 신선하다는 착각이라도 주는 채소를 씹고 싶었다. 제품 사양이 낮아 연근, 마 따위처럼 어쩐지 보존식품에 가까운 채소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거긴 환풍 시스템이 고장 나서 산소 공급이 중단된 지역입니다.”

“그것도 고치면 되겠네. 뭐 하는 공간이야?”

“… 환풍 시스템이 있는 공간까지 포함입니다. 내부 설비실에 산소가 없어서 수리하러 들어갈 수 없습니다.”

42는 또다시 대답을 교묘하게 피해 간다.

“공기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데, 들어가야 공기를 만들 수 있다라. 흠. 산소 탱크를 이용하면 어때. 의무실에 그런 거 있지 않아?”

“의료용 산소 탱크가 있는데, 네바는 심장 강화 상태라 산소 소모량이 많습니다. 최대 30분 정도. 수리하시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그 정도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기 순환 시스템이야 이십 분이면 떡을 치지.”

“10분 여유는 너무 타이트해서 위험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42가 지적했다. 네바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한다.

“위험하면 도중에 나오면 되잖아. 아예 시도도 안 해볼 순 없어.”

“그러면 제가 곁에 따라가겠습니다. 타이머를 확인하다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끌고 나올게요.”

무섭네. 너 오늘 케이블 설치하러 안 나가? 그는 접시를 정리하며 킬킬댄다.


“타이머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네바는 마스크를 쓴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문을 열어주었고, 공구 상자를 들고 옆을 따른다. 제법 긴장한 것 같은 옆모습이 질문을 쪼아보기 적합한 타이밍 같았다.

“있잖아. 너 소행성 충돌 이후 뭐 하고 있었어?”

이어지는 침묵. 산소통 호스로 쌕쌕거리는 네바의 숨소리만 복도를 가른다. 예상된 반응에 그는 준비한 돌멩이를 꺼내 던졌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고친 저장소 기록 보니까 네 로그가 지워져 있더라고?”

“… 외부 탐사 중이어서 제대로 기록에 남지 않은 거 아닐까요?”

42는 어색하게 앞만 보며 걷는다. 작은 단서라도 놓칠까 항상 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닛이.

“외부 활동은 로그에 안 남아? 희한하네. 블리자드가 저렇게 도는데 외부에 그렇게 자주 나갔어?”

“비상 상황이었으니까요. 긴밀하게 통신을 유지하기 위해선 중계기를 바로바로 수리해야 했습니다.”

“나한테 말 못 하는 게 있는 건 아니지?”

“⋯ 저는 거짓말을 못 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 너무 오래된 데이터라 덮어쓰기되어서 제 기록에 남은 게 별로 없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편리하겠다. 네바는 문장 끝을 늘인다. 잘 피해 가네. 곧 둘은 제어실에 도착했고, 42가 빠른 속도로 얼어붙은 문손잡이를 제거하여 경로를 개척했다.

“22분 8초 남았습니다.”

그만 재촉해도 돼. 네바는 제어반을 열어 시스템을 빠르게 스캔한다. 아. 이쪽 환기팬 모터가 완전 얼었네. 이거부터 녹여야 뭐라도 돌겠는데?

“제발 산소통을 멘 채로 토치를 사용하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여긴 저산소 구역이기도 합니다.” 공구 상자를 열어 뒤적거리자 42가 어깨를 붙잡는다.

“들켰네. 근데 방법이 이것밖에 없잖아? 다시 나가서 히터를 켜고 기다릴 순 없어.”

네바는 만류하는 손길을 피해 작은 용접 토치를 꺼냈다.

“조심해서 살살 할 테니까 물러나.”

“저쪽에 계시면 차라리 제가—”

“여기 다른 부품 많아서 너한테는 너무 까다로운 작업이야.”

그를 어깨로 밀고 토치에 불을 붙인다. 조심조심. 산소 농도가 거의 없어 불은 주홍색으로 타오른다. 42는 입술을 깨물다가 조용히 경고한다. 타이머 3분 19초 더 앞당겼습니다. 의료용일 뿐이라 밀폐가 안 되어서 저산소 공기가 계속 혼입될 거예요.

알겠어. 후딱 하고 나갈게.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오랜 시간 얼어붙은 모터는 금방 녹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산소를 죄다 긁어모아 타는 불이 그리 시원치 않다는 점도 있었다. 네바는 자꾸 침침한 듯 가물거리는 눈을 문지른다.



“10분 남았습니다.”

다 녹였어. 그의 재촉에 허겁지겁 전력을 연결했지만 여전히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았다. 뭐가 또⋯, 아, 베어링까지 녹았네. 방치된 부품이 곳곳에서 말썽이었다. 네바는 공구 상자를 한참 뒤지며 교체할 부품을 찾는다.

“토치 사용으로 산소 소모량이 예정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나갔다가 산소통을 교체해서 다시 들어오시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들어온 김에 다 하고 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아.”

나가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초조해하며 팔을 당기는 건 오히려 42였다. 오래된 나사는 녹슬어서 쉽게 빠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미약한 두통이 이어지는 바람에 나사를 쥔 손 놓칠 뻔했다. 헛손질하는 티라도 내면 당장 들쳐업고 나갈 기세인 유닛을 두고 나사를 우악스럽게 밀어 넣는다.

뒷부분은 겨우 욱여넣었지만 다행히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됐다. 제어반에 초록색이 뜨고,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성공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42는 그를 덥석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생각보다 센 힘에 네바가 덜렁 들어 올려진다. 어라. 의외로 힘이.





day 24.

“—엄청 세네?”

옆구리에서 꺼진 기억은 침대 위에서 켜졌다. 네바는 얼떨떨하게 이불 안에서 눈을 뜬다.

“산소가 다 떨어져서 복도 중간에 기절했습니다. 불완전 연소로 일산화탄소까지 혼입되어 아직 어지러울 수 있어요. 다음 번에는 더 보수적으로 계산하겠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이 내려다본다.

“원래 이렇게 위험하게 작업하는 스타일이십니까? 외부 작업 시에는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하더니.”

“내 몸인데 왜 네가 화를 내고 그래. 무안하게.”

“목표 우선순위는 제 신체가 아닙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약속은 너무 거창한 언어인데. 어쨌든 너랑 같이 있었으니까 성공은 했잖아?”

하아. 유닛은 다 들리게 노골적인 한숨을 쉰다. 숨을 쉴 필요도 없는 게.

“저는 연구원들의 정신건강 상태를 판정하고, 자살, 자해적 사고가 높아지는 경우 구금 조치를 시행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렇게 협박을 하시겠다?”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당분간 저산소증 후유증으로 단기 기억이 유실되거나, 신체 불협응 증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뇌신경 조직이 일부 망가지면 신경 임플란트 재배치가 필요할 수도 있고—”

네바는 말을 멈추지 않는 유닛에 키스한다. 당황했는지 혀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녹녹한 혀는 3초 정도 아무 반응 없다가, 뒤늦게 그를 향해 움직인다. 꼭 감정이 실린 것처럼. 약간의 압력을 담아 그를 눌러왔다.

“방금 임플란트 확인했지? 별로 손상 없는 거 확인했을 테니까 됐어.”

속닥거리자 42가 대답 없이 다시 입을 맞춘다. 사무적으로 움직이던 때와 다르게 인공 혀는 더 변칙적으로 입안을 휘저었다. 아. 마음만 먹으면 진짜 잘하네. 부러운 자식. 네바는 속으로 생각한다. 몸이 기억하는 자극에 아랫배가 짜릿해진다.

⋯ 짜릿해진다.

“아야.”

그가 틈을 보일 때 얼굴을 떼고 신음한다.

“이제 막 사람을 공격하네.”

42는 그를 밀어붙이며 목으로 움직인다. 좁은 침대가 다시 둘로 엉키고. 그건 피부 거죽을 씹을 기세로 입술을 내렸다. 질기고 둔감해진 흉터 위로 쏟아지는 자극보다 신경 쓰이는 건, 골반 주변에 흐르는 미세 전류였다.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정전기처럼 피부가 따끔거렸다.

“⋯ 신경 손상을 막고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마사지를 해 드리는 겁니다.”

“거짓말도 하고?”

“현재 인공 존재 협약을 위반한 요소는 없습니다.”

쪽쪽거리는 입술은 옷 안으로 더 파고들고 싶어 안달이 난다. 저주파를 감은 손이 일체형 작업복의 지퍼를 쥐었다. “더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하는 눈이 미약하게 떨린다.

“섹스하자고?”

“네.”

그래. 대답이 성대를 울리기도 전 그것은 빠른 반사신경으로 지퍼를 내렸다. 안에는 기름때며 먼지가 묻지 않게 받쳐입은 검은 민소매 한 장뿐이었다. 어깨를 움직여 작업복을 벗기는 움직임에 동참해 준다. 추운 공간이어도 계속 좁은 설비실 안에서 작업한 터라 땀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씻지도 않고 대뜸 하려니까 어색한데.”

네바는 녹과 기름때가 잔뜩 묻은 손을 꿈지럭댄다.

“저는 방진 코팅되어서 괜찮습니다. 충분히 위생적이에요.”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미끈한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저 침은 뭐로 만들어지는 거지. 한 바퀴 손가락을 적시고도 혀끝으로 축축한 액체를 더하는 42를 올려다본다. 그는 작업복을 다 벗기기도 전에 인공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속옷 밑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전류를 흘리던 손은 반틈 누그러졌는지 민감한 부위에서까지 성질을 부리진 않았다. 여전히 근육은 전기 신호가 잔류하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따끔거렸지만.

헛, 삽입부터 하고 보는 손짓에 숨을 들이쉰다. 더러운 손을 어쩌지 못하고 시트만 쥐자 42가 손을 가져가 자기 목에 두르게 했다.

“… 바로 밑에 칼이 수납된 손가락에 쑤셔지니까 기분이 이상하군.”

“잘됐네요. 공포는 성적 긴장감을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규칙적이고 계산된 움직임은 왕도를 걸었다. 그는 민소매를 밀어 올리고 가슴 주변을 핥는다. 체온보다 절절 끓는 혀에 상체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거 포르노에서나, 읏, 주장할 법한 의견인 거 알지? 업데이트 많이 해야 돼.”

“제가 감정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끝을 세운 혓바닥처럼 뾰족한 말이 돌아온다. 슬쩍 마주친 눈가 아래가 붉었다. 삐진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 몰라 섹스하려 드는 유닛이라니. 생각보다 귀여운 면이 있나. 서툰 표정에 비해 큼직한 손가락은 너무 노련하게 내부를 휘젓고 있지만. 네바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가슴을 애무하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린다.

“지금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건 압니다. 흉통의 움직임이 감지되거든요.”

아니, 좋아서 그랬어. 오해하지 마. 다리를 감으려고 했지만 애매하게 벗어지다 만 작업복이 하체를 붙잡았다. 이도 저도 아닌 각도로 허벅지를 벌린 채 42에게 매달린다. 헐떡이자 손목이 움직이는 속도가 다이얼을 돌리듯 정직하게 상승했다.

그를 최대한 끌어당겨 볼과 턱 주변에 입술을 문댄다. 허벅지가 경박하게 널뛰려고 하자 42가 센 악력을 이용해 그를 잡았다. 위에선 체중을 실어 눌러오고. 아래에선 오래되어 딱딱하게 주저앉은 매트리스가 버티고. 그 사이에 낀 채 다가오는 쾌감을 낚아채기만을 기다리다, 순간 옆구리에 들어온 전기 신호에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빠르게 이를 깨물지 않았으면 이응 받침으로 끝나는 콧소리가 크게 튀어 나갔을 법한. 날카로운 감각이 지방질을 갈랐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묵직한 자극.

네바는 그가 놓은 전류 함정에 세 번 걸려들고. 방을 울리는 신음을 다섯 번 토해낸 끝에.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


“하아아. 오늘 그건 진짜 반칙이야.”

42는 뒤늦게 작업복을 모두 벗겨주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에 천천히 입을 맞추면서.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제법 사랑 흉내를 내며 다정한 후희를 건넸다. 반쯤 내려간 속옷도 마저 치우고. 데워진 이불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늘어졌다. 노곤해진 몸을 미동도 않은 채 입술만 겨우 움직였다. 기절까지 한 사람한테. 너무하네.

“어떤 것 말씀입니까?”

“그거⋯, 전기 충격 주는 거.”

“전기 마사지 말씀이지요. 원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능입니다. ⋯ 오늘은 저산소 혈증에 맞추어 혈류를 촉진하고 근육을 자극하기 위해 몇 번 시행했습니다. 의료용 저주파 치료에 사용될 만큼만 미약하게요.”

구라잖아. 그냥 심술부린 거지.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저는 거짓말을—, 알아. 못 한다고. 천연덕스러운 손이 옆구리를 계속 간질였다.

“… 부정적인 흥분은 긍정적인 흥분과 구분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옷을 벗어도 되겠습니까?”

42는 옆에 모로 누워서 이쪽을 계속 바라보다가 물었다.

“맘대로 해.”

42는 부스럭거리며 웃옷을 벗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에게 손댈 시간도 없었다. 다음번엔 옷도 벗으면서 천천히 하든지 해야지. 이번에는 어쩐지 바지까지 벗는 모습을 감상한다. 통통하게 잘 빚은 가슴에 절묘한 각도로 떨어지는 골반. 연구소에 공용으로 배급된 회색 티셔츠와 같은 색으로 된 회색 속옷까지. 인공존재협약 인증 라벨은 골반뼈 위쪽에 일련번호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어라. 잠깐. 속옷 차림으로 이불 안으로 들어온 그는 두 팔로 덥석 네바를 끌어안았다.

“젖었네?”

단단히 조여지는 품 안에서 결국 신경 쓰이는 걸 말해버린다. 바지에서 다리를 꺼내며 올라간 속옷 아래는 분명 거뭇하게 젖어있었다.

“저도 흥분하면 똑같이 반응하거든요. 인간 신경이 자극되어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처럼. 센서가 자극되면 보상 신호가 반응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만들어진 게 아니고 만들었다라. 말없이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자 42가 자동으로 응답했다.

“네. 제가 만들었습니다. 서포트형은 섹스 도중 인간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신체 반응을 출력하게 되어있지만, 실질적인 보상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42는 얼굴을 떼고 이쪽을 바라본다. 고백하는 눈동자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담긴 듯했다.

“보상 체계?”

“통증 시스템과 대칭적인 구조입니다. 일정 이상 긍정 피드백이 입력되는 경우 서버에 보상 신호를 과량 투하해서, 의도적 과부하를 일으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만든 체계라 반응이 입력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너도 오르가즘을 느낄 줄 안다는 거야? 정신적으로?”

하하. 엉큼하네. 네바는 얇게 부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묻는다. 42는 그의 품을 파고들며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얽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일부러 상황 판단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기능을 추가했다 이거지? 허가된 건가?”

“마지막 연구원이 사망한 이후 장기 목표가 연구소 관리로 바뀌면서, 제한적 창작이 추가 허용되었습니다. 가끔 제가 수정한 영역이 충돌을 일으키면 이런 랜덤한 충동이 이는 단점이 있지만요. 제가 섹스를 먼저 요구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르가즘 연구는 연구소 관리하고 아무 상관 없잖아.”

네바의 입가에선 이죽이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른다.

“79년은 독자적 연구까지 진행해도 될 만큼 긴 시간입니다. 당신이 살아온 삶보다 두 배는 길테죠.”

그러고 보니 쟨 몇 살인 거지. 네바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래서, 제대로 ‘느껴본’ 적은 있었어? 경험한 적 없는 개념을 구현하려면 어려웠을 텐데.”

“지금까지 저와 관계한 여성 11명과 그들이 남긴 창작물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체액 분비, 심박수와 혈류량 변화 같은 직접적인 신체 반응 외에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남기는 생리적 현상, 정서적, 심리적 영향까지 포함해서요.”

창작물? 네바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보송한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베어링을 고치는 동안 손에 가득 묻어난 녹은 한참 전에 42가 입으로 정리했다. 소설, 영화, 영상 기록 같은 것들입니다. 밑에서 구물대는 대답이 올라온다. 으흠. 그런 건 참고하지 말지. 네바는 인류 문명이 낳은 안타까운 혼종을 내려다본다.

“부러웠어?”

“궁금했습니다. 잘못된 건가요? 계속 물어보시네요.”

42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눈동자 밑의 센서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런 건 아니고, 웃겨서⋯, 아니, 사람마다 개인차가 큰 분야니까 왜곡이 있었을 것 같거든.”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타인이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개념이 아니기도 하고요. 다만 제가 긍정적으로 느낀다면 그런 거겠죠.”

그래. 그는 제 가슴에 안긴 유닛의 머리통을 내려다본다. 본인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르가즘을 셀프로 코딩해 넣은 섹스 로봇은 이게 전 우주 최초겠지. 솔직히 반응이 궁금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너무 지쳐서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만지지 않았는데도 남을 보며 질질 흘리고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근데 만들고 혼자 테스트 안 했어? 왜 지금이 처음이야?”

“아.” 42는 정말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생각은 못 했습니다. 늘 둘 이상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거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테스트해 볼까요?”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해봐.”

그리고 자위하는 섹스 로봇도. 그는 숨죽여 흐느낀다.

“수상하게 웃으시네요.”

천진하게 상체에 입을 맞추는 유닛을 보고 이게 뭔 생각이람. 대견해서 그래. 네바는 여전히 가슴을 들썩거리며 그를 쓰다듬는다. 칭찬으로 받겠습니다. 42는 그와 상관없이 그런대로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